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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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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67회 25-10-19 06:44

본문

포도원의 비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백성들을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며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묻는다. 이 말은 즉슨, 그 권세의 주인은 우리이고 우리는 네게 권세를 허한 일이 없건만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성전에 들어와 저들을 가르치느냐는 말이다. 참으로 위압적이 아닐 수 없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건만 이들이 이렇게 거만한 주장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구별된 레위인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온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 또한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경건함, 신실함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서 이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재물과 권력, 이권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들은 점차 믿음이 아닌 그 권력에 취해갔고 결국 그 목적이 변질되어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그 재물을 섬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코 빼앗겨서는 안되는 권력의 상징이자 정치적 요충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실제 주인은 하나님이시란 걸 알지만 딱히 관여도 않으시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누구도 문제삼지 못한다.
저들은 그렇게 서서히 그들이 실질적인 성전의 주인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반항하거나 대적하는 자들은 은밀히, 혹은 거짓 증거로 담대하게, 그런 식으로 많은 선지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저들은 저리도 당당하게 예수님께 따지고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만한 저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하늘로서라 하면 예수님 또한 그리스도일 것이니 저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들 주장할 권리가 없고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에게 지탄받거나 오랜 시간 쌓아온 진의를 의심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저들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임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의논만 하다 알지 못하노라 하며 대답을 피해버린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질문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권세 따위는 없음을 드러내시는 질문을 말이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이 한 사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은 말로는 가겠소이다 말하나 행하지 않는 자였고,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하였으나 후에 뉘우쳐 행하는 자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둘째 아들이 세리들과 창기들이요, 저 행하지 않는 맏아들이 바로 너희의 모습이라 하신다. 또한 저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신다.
아무리 율법을 열심히 외우고 지켜도, 의로운 말을 하는 듯 행동해도 그들은 저 세리들과 창기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의의 도로 찾아온 요한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을 믿는 것이 곧 아비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장하듯 진정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들이라면 분명 요한을 믿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여태껏 보내심을 받은 많은 선지자들에게 그래왔듯 듣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그저 외면해버린 것이다.
 
반면 저 세리와 창기들은 율법에서 먼 자들이었으나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더 깊이 체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구원을 간절히 구하게 된 것이다. 부족한 이들조차도 요한을 믿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그들은 뉘우치지 않는다. 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머릿속에는 그저 권력을 지키려는 욕심과 초조함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라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은 보고도 믿지 않았다. 느끼고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요한을 믿지 않기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 또한 마주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은 믿음에 있어 분명 유리한 고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세리들과 창기들보다도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믿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이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이어지는 비유는 더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첫 번째 비유가 그저 그들의 믿지 않음을 책망하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 비유에서는 그들의 이때까지의 작태가 보다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대답을 외면하거나 선지자들을 해쳐오면서까지 그리도 숨기고 싶어하던, 그들이 긴 시간 구축해온 은밀한 카르텔 구조 내면의 진상이었던 것이다.
이 비유에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삯꾼으로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주인에게 고용된 평범한 농부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실과 때가 되어 수거할 종들을 보내자 변모하여 그들을 죽이고, 때리고, 돌로 친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이들의 실체이다. 그저 실과에 눈이 멀어 종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것이다. 진실을 외친 스가랴는 어찌 되었던가. 또한 선지자 미가야의 처우는 어떠했던가. 그는 사실만을 얘기했으나 미움받았고, 자신이 참된 선지자라 주장하는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영이 자신을 떠나 어디로 가냐며 미가야를 치지 않았던가. 그는 그저 자신에게서 그 권능이 떠났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짓으로 꾸며 가로챘고 이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이용해왔다.
이는 모두 그저 주인의 유업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주인의 실과와 포도원에 눈이 먼 저 자들은 끝내 주인의 아들마저도 ‘저는 상속자니 죽여 유업을 차지하자‘ 하며 죽여버리고 만다. 이것이 결국 어쩔 수 없는 삯꾼의 말로란 말인가?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게 될 것이다. 상속자되시는 예수님만 제거한다면 그들이 그토록 탐내는 주인의 유업, 그 성전과 권력은 그들의 차지가 될 터이니 말이다.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들의 미래이다.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앞으로 어떻게 치달을지, 그런 그들이 결국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까지, 어찌 보면 예언에 가까운 그런 비유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 비유를 듣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하라' 하신 이유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못 박아 죽이고야 만다. 그들은 이를 듣고도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깨닫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부인하려 한 것인가.
주인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냉큼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 것이라 대답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그들은 진멸 당하게 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그들은 여태껏 그렇게도 많은 선지자들을 핍박해왔다. 하나님께서는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셨으나 그들은 결코 돌이킴이 없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의 언약은 끊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성전의 주인인 마냥, 건축자라도 된 듯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재다, 끝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마저도 내쳐버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결국 이들은 폐하여지고 오히려 버림받은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어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 새롭게 세우심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예언은 성취된 것이다.
 
새로이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께 어떤 자가 떨어져 깨어진다고 한다. 이는 우리와 같은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께 나아가니 그를 통해 자신이 죽었음을 알게 되고 깨어져 그 자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들. 그들은 그렇게 새롭게 태어나 성장하고 열매 맺는 백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또 다른 자는 가만히 있었으나 오히려 그에게로 돌이 떨어져 가루가 되어 흩어짐을 당한다. 이는 저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과도 같아 보인다. 가만 보니 이 돌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뜨인 돌과도 매우 비슷하다. 이를 보면 다니엘이 해석했듯이 저 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심판받아 부서져 소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비유는 말하고 있다.
피할 수 있다 생각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심판받아 진멸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비유 또한 앞전에 나온 비유들과 같은 예언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레미야때에 사람들은 수많은 악행과 우상숭배를 저지르고도 성전에 들어가 구원을 얻었다 하였다 한다.
하나님의 성전이 도적의 굴혈이라도 되는 마냥 그 모든 가증한 일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은 성전에 대해 무언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무슨 리셋 지점이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다.
성전의 역할은 하나님의 처소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분 자체로 성전으로 불리우게 된다. 그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입어 새롭게 영적인 존재로써 성령과 동행하는 성전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들어가시어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을 쫓아내신다.
그런데 이 일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저 이상한 일이라고만 여긴다. 
그들 또한 강도이기에 문제의식을 못 가지는 것일까? 그들에게 성전의 의미는 이미 너무나도 변질되고 말았다. 진정한 강도는 사실 저 거짓선지자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여 백성을 가로채고 선을 가장한다. 선량하고도 참된 선지자인 척 천국 문을 가로막고 지옥 자식들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저 예언의 대상들은 멀리 있지 않다. 오늘날 까지도 거짓선지자들은 세상에 팽배해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명맥은 아직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알았을까. 또한 지금 이 시대의 거짓된 목회자들은 알고 있을까. 이 비유가 예언과도 같으며 또한 그 누구도 아닌 그들 스스로가 심판으로 이끌 예언을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말이다. 화 있을찐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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