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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세번째 멜기세덱의 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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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463회 26-05-04 22:59

본문

십자가 

세번째 멜기세덱의 반차

 

 
 
"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 
 
 
 >기세덱은 살렘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한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된다. 이는 마치 예수님을 연상케 하지 않는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예수님 말이다. 사실 떡은 그의 몸이요, 포도주는 그의 피다. 멜기세덱은 매우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살렘왕이라 한다. 이는 꽤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평강의 왕 그리고 평안을 비는 예수님, 과연 이는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일까?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런 존재와도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요,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놓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다시말해 중보자인 것이다.  
 
>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께서 하늘에 있는 원형의 성소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고, 하나님께 자기 피로써 화목제를 드렸다 한다. 이는 꽤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면 말이다. 십자가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싶은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를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십자가란 어떤 특이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매우 복잡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설계도면을 보는 것과도 같다.
 
> 그러나 단편적인 부분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여기에 죄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죄인이기에 정죄를 받아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죄인은 회개하였고 슬퍼하였으며 그 죄의 형벌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죄인이었지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찾아와 그를 위하여 대신 형벌을 받겠다 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것이다. 죄인은 생각했다. 저분은 누구시란 말인가? 어찌 나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단 말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 죄인은 하나님께 말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죽으셨나이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그가 죽으셨나이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죄인에게 말하신다. 그가 너를 위해 죽었으니 이제 너는 내 아들로 살리라. 그가 너를 사랑하여 너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너는 그의 이름으로 살리라. 꽤 감동적이지 않는가? 그의 대속하심이 말이다. 자, 이제 생각해보자. 여기에 제사라는 것이 있는가? 제사란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저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다. 그렇다면 이는 정녕 제사였단 말인가?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 나님께서 제사를 원한다고 생각하는가? 문제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신다고 생각하기에 그 제사를 드려왔다는 것이다.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면 그 댓가로 죄사함을 얻게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를 기뻐 받으시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를 위해 죄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인이 의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이었겠는가? 영원히 반복되는 그런 제사였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더욱 근본적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설명하는 것이 조금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잘 따라와 주길 바란다.
 
> 십자가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바라보는 이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이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는가?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보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다.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저곳에는 내가 죽어있는 것이다. 이를 믿는가? 자신의 죽음을 믿는가 말이다. 만약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죄인된 자신은 그곳에서 그렇게 죽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는 생명에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 볼수도 있다. 이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옛자아는 그렇게 죽게 되지만 새로운 영적인 자아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예수를 믿는 자는 산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처음부터 믿지 아니함으로 그저 죽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 잘보면 제사란 그저 죽음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린양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그렇게 가장하는 것이다. 정말로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그렇게 믿느냔 말이다. 많은 헌금이 정말 죄를 용서한다고 그렇게 보는가? 어린양을 희생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이를 흠향하시고 기뻐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사해주신다고 그렇게 믿는가 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제사의 원형은 저 하늘에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바로 저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사랑과 희생이 바로 진정한 제사였다는 말이다. 
 
> 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저 십자가 안에 있다. 단순히 죽음을 가장하여 회피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은 그저 과정일뿐 생명으로 나아가는 그 첫걸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렇게 죽음을 가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가게 된다. 저 죄인처럼 말이다. 물론 이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자신의 뜻대론 아무것도 할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속함을 받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들과도 같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더이상 이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더 높은 영적세상을 바라보며 더 높은 가치를 위해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몸은 비록 이 물리적인 세상에 그렇게 묶여있을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할수도 있다.
 
>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겠다 하신다. 또한 예수께서도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으로 가장한 노아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오면서 예수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와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성령의 강림은 또한번의 기회와도 같다. 영원히 떠나셨던 성령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는 그에게 있어 엄청난 가능성이자 커다란 소망인 것이다. 비록 예수를 믿는 자들에 한해 주시는 것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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