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35회 25-04-02 14:57본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많은 병든 자들이 곳곳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나음을 얻던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온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서 계신 게네사렛 땅까지 찾아와 그들의 유전을 범하였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그리 멀리서 찾아올 정도로 문제 삼을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 유전이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와 달리 또 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애초에 율법만을 가지고 그에 반하는 것을 지적하거나 문제 삼으면 되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세세한 적용으로 들어가면 애매하고 미묘한 충돌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유전의 취지 자체는 그들이 율법에 대해 고민하고 이해하여 실생활에서 적용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발전한 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법의 취지가 만인의 안녕과 약자 보호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지금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힘을 발휘하듯이 장로들의 유전 또한 권력 구도에 따라 그 뒤틀림이 생긴다는 문제를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있어서 유전이라는 것은 그들의 굳건한 법이었고 또한 믿음의 증명이었다.
그런 법을 어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인하신 죄라 판단하며 마땅히 죽음까지도 끌고 갈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렸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전을 범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분하였을지도 모르며 혹은 좋은 빌미를 잡았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납득하기 어려울 말씀을 하신다. 그들의 유전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실 이는 유전이라는 것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들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그 문제점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게끔 강제 각성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여긴다.
사실 제자들의 예상이 맞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알지 못했던 진실을 목도해 혼란스러워하고 돌이키는 자들보다는 그럼에도 또다시 진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이전부터 그 문제를 알고도 외면해온 자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그냥 두라 하신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뽑힘이 될 뿐.
저들은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어 스스로 구덩이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그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저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집착하고 유전을 만들었으며 이를 전파하고 또한 따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다르다.
저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 하나 사실 마음은 이에서 먼 것을 지적하신다. 저들은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말씀하신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같은 것 말이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더러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실은 그것이 틀린 것임을 이 비유로써 명백히 드러내신다. 저들이 말하는 씻지 않음 혹은 각종 오물이나 먼지, 아니면 부정함 따위가 정말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잠시 더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씻어내면 그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혹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말씀하시려 했던 그런 더러움은 그런 일시적이거나 표면적인 것을 뜻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그런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입으로 들어가는 것, 바리새인들이 금지하는 저 씻지 않고 먹는 떡 같은 것을 예수님께서 먹는다 한들 그 본질을 더럽게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정말 더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는 저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들은 저들의 몸은 깨끗케 하였을지 모르나 예수님께 나아와 그들의 유전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공격하려 한다. 그러한 그들의 말이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말속에 숨겨져 있을 그 의도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 그들을 더럽다고 여기게 만들지 않는가?
말은 결국 그 본질에서 나오게 되어있다.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바, 바라는바. 그것은 숨기려 한들 숨겨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더러움이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끊이지 않고 그 더러움이 흘러나올 것이며 결국은 그 주위마저도 오물투성이로 만들 것이다. 저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귀한 것으로 치장하고 정결한 것으로 몸을 꾸민다 한들 과연 그들을 깨끗하다 여기겠는가. 아름답다 말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듣고 깨달으라 하신다. 또한 비유의 해석을 바라는 베드로에게도 깨달음의 부재를 책망하신다. 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고 또한 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우리는 과연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더러움이란 어디에서 나오는지. 또한 진정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