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예수의 이름으로 | 1. 죄사함을 받으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5,354회 14-06-23 21:58본문
1. 죄사함을 받으라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만일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자요, 율법의 정죄 아래 사망이라는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자가 된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악의 상태이다. 왜 인간은 이토록 최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마도 아담이나 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죄사함이란 당연한 과정이요, 실질적인 믿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사함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이제 구체적인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적용을 위한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자신에 대한 확증을 얻기를 바란다. 아멘!
나는 과연 죄사함을 받았는가? 이것은 매우 힘든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반드시 확신에 이르러야 할 부분 또한 이 부분이 되지 않겠는가? 만일 죄사함을 아직 받지 못했다면 아직도 나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될 것이며, 또한 저주 아래 있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죄사함을 받았다면 은혜 아래 있는 자이며 다시금 율법 아래 살아 갈 필요가 없는 자가 된다. 이처럼 죄사함이란 율법과 관련하며 율법에 대한 정의에 따라 그 진의를 확신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먼저 분명하게 밝혀두건대 이 시대의 교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로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죄사함을 받았다고 스스로 믿는 자들도 있으나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을 뿐,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사람이 지킴으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은 곧 생명의 법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스스로도 악인으로부터 보호 받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법은 치우쳤으며 비뚤어지고 헛점 투성이였다.
이 법은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강탈해 간 장본인이 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더 나은 법을 기대하며 그 과정의 모순을 참아 내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완전하며 분명하여 악인의 피할 수 없는 덫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키기 어렵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인간은 무지하며 어리석으며 게으르고 또 실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깨닫는 자가 있었어도 그는 인생의 여정 가운데에서 죄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려 했던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비밀을 알리셨는데 그것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인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으로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사망에 이르게 될 운명을 버리고 은혜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이요, 은혜는 깨달은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었으나, 그들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어 율법처럼 되었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의 양심이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 뿐이다. 다시 말해 정죄의 역할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은혜는 그 죄를 사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를 버리도록 돕는 것이며 또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율법 아래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뜻은 율법을 지켜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성수를 해야 한다든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든지 목사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든지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성경의 말씀으로 협박되어진 말씀이든지 영으로 들은 법들이든지 모두 율법이며 이것을 지킴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특별히 교회에 다녀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분명 율법 아래 있는 자이며, 그러므로 이들은 율법의 정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들은 회개할 것이며 또 정죄를 받게 될 것인데, 끝없이 반복되는 제사처럼 이들도 끝없는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 더욱 강하다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 따라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죄사함을 아직 받지 못한 자들이며 성령의 세례 또한 받지 못했고 아들이라는 인침이 없는 자들이 된다.
이제 이런 결과를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말로 죄사함을 얻었는가? 율법 아래에서 벗어난 자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은 자들은 다시 한번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할 것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완성됨과 동시에 폐함을 당하였다. 율법으로는 생명을 목적하였어도 그 결과는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은혜로 그 율법은 생명의 법에게로 인도하는 사망의 법이 되어 그 목적을 이루었다.
성령의 법에게로 인도하는 죄와 사망의 법이 율법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바울이 주 예수께 받아 말한 계시이다. 율법은 은혜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율법의 요구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율법은 지킴으로 이루어지리라고 했으나, 은혜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며 선물로 성령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 은혜는 받는 것이다. 받기 위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또한 성령의 인침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전에 율법을 허락하신 이가 이제 은혜와 진리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은혜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율법을 따랐다. 주 예수께서 오셔서 주신 율법을 폐하시고 은혜와 진리를 베푸시며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청하셨으나 이들은 오히려 예수를 버려 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주께서는 지금까지 있었던 뒤틀린 이스라엘의 패역과 그 인도자들의 간교함이 뱀의 간교함임을 증거하셨다. 또한 유대인을 버려 자기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셨고 이방인들을 향하여 오히려 자기 백성이라 하셨던 것이다. 주께서 이와 같이 유대인들을 버리고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푼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비유에 이른 바와 같이 그들은 청한 손님이었고, 우리는 나그네요 병신이요 거지들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만유의 주를 버렸기 때문에 병신 같은 우리가 긍휼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교만한 이방인들인 우리여! 이제 기억하라. 우리의 집엔 우상이 아직까지 가득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아직 그대로 우리에게 있지 아니한가?
주께서 믿지 않는 자에게 분노하심이 크겠는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우리에게 분노하심이 크겠는가? 주의 주신 것은 법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은혜도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법이었다. 정죄의 역할만을 하는 선한 법이다.
수많은 교회에서 목회자들은 가르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교회의 법에 순복할 것을 가르친다. 만일 그 법들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공격 당할 것이며 심지어 구원까지도 파기 당할 것이라고 위협 받게 될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아! 율법은 몽학 선생과도 같이 단지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만을 할 뿐이 아닌가? 이처럼 그대들은 예수를 바라는 보지만 그에게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
예수를 향하여 서며 그에게 나아가 죄 사함을 받으라!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시리라. 우리는 율법을 통해 예수를 바라 볼 것이며 또 율법을 통해 자기를 채찍질하며 또 율법을 통해 모든 선한 것을 배울 것이나 그것이 어린아이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죄 사함을 받은 자, 성령을 받은 자는 다시는 율법 아래 있어서는 안되며 정죄도 받지 않아야 하며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싸워야 할 것이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으로의 고백이 필요하다.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백해야 할 내용은 주의 복음과 가장 큰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전하는 자의 복음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듣는 자의 이해가 얼마나 정확한가가 그 다음인 것이다.
전하는 자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보냄을 받은 자여야만 한다. 보냄을 받지 않은 자의 복음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또한 그 내용이 아무리 성경적이라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복음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따라 사람들과의 중재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를 허락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특수한 경우에만 한한다. 여기에선 일반적인 상황만을 이야기 하겠다.
보냄을 받은 자가 전하는 복음은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해되지 않는 복음은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값이 완벽하게 속함을 얻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그의 부활과 영생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의 내용은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며 깨달음이 없이는 어떠한 고백도 있을 수 없다.
고백은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중심의 고백만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는 유일한 통로가 될 것이다. 우선 자신이 죄인 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죄가 있다. 우선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엔 예수께서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중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의미하는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어져오는 삶의 모든 고리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부모나 형제나 친구에게 조차도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만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런 자신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이름으로는 이제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시금 과거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그 행위 자체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져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이런 일을 하게 된 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모욕한 자로 인정되어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이러한 자가 있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결코 중심으로 깨닫고 고백한 자가 아니면 죄사함을 주시지도 않으시고 성령의 인침도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