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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 3.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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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297회 14-06-28 17:09

본문

 3.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성경 속에 계시된 교회와 우리의 현실 속의 교회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더욱 열심히 읽었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경 속에 그려진 교회를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이제 그것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 가지 것을 그려내고자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이들의 기도와 열심이 나머지 부분들을 빠른 시간 속에 풀어내길 기대해 본다.

첫 번째 - 돈의 가치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가 복음 10장 중에서……)

 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돈은 사람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평가 받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과연 돈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까? 성경 속에 그려진 이 부자 청년만을 보더라도 돈은 그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많이 소유한 자에게 엄청난 해마저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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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 평가하시기를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과 견주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돈이 갖는 특수한 성질 자체가 인간의 욕심을 일으킴으로써 마치 하나님을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의 삶 또한 돈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엔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생겨났다. 각 시대들을 통해 보면 주기적으로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자기의 소유를 버리고 공동의 소유로 하는 현상들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조금만 주의 깊게 흘러간 역사들을 살펴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공동소유를 했던 것은 초대교회를 모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교회들은 초대 교회를 모방하였을 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들이 그렇게 한 것은 초대 교회를 강타한 성령께서 그들에게도 오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신다면 반드시 그런 공동의 소유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며 동시적으로 반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또 반도덕적인 현상들도 일어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분명히 말해서 인간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며 세상을 뒤집어 엎는 것이며 일반적인 모든 윤리나 도덕을 거절하며 실제의 의로움을 자기 안에 소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제시한 것들 중 하나가 이 돈에 대한 가치 개념이라 하겠다. 곧 돈은 별 가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더 좋은 기도라는 것을 성령께서 그들에게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시대마다 있었던 이 공동 소유와 같은 모습은 아주 귀하고 값진 것을 발견한 그들에게 있어서 돈은 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 하겠다. 이 돈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있어 거추장스러울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것으로써 인식하게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 복음 10장 중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였다.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멋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렇다! 우리로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 구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금의 선행이나 자신의 삶을 위한 여러 가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들 뿐이다.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때에 예수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께만 있는 무언가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께 나아와 꿇어 앉아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고자 했다. 자기에게 없는 무언가를 예수는 갖고 있음을 그는 알았고 그것이 율법의 더 깊은 선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주시러 온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주시러 오신 것이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율법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럴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하사 영생의 길을 그에게 가르쳐 주신다. 은혜와 진리의 길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재산이 많은 자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가난한 자였더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을 텐데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눈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그로 하여금 가난한 자에게 그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라 하신 것은 예수께서 그의 재물을 탐하시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알게 하려 함에 있다. 예수께서 그에게 원하신 것은 그의 재물이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근심하여 돌아갔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마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와 같아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단지 교회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대신 해주는 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아들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교회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본뜻을 왜곡시킨 일에 관한 모든 책임은 교회의 인도자들이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것으로 자랑할 것이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것이며 또 금을 구하는 것처럼 은을 구하는 것처럼 지식을 불러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처럼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아멘!

두 번째 - 사랑의 계명

 예수님의 교회가 과연 세상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곤 한다. 예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했더라면 그들이 나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었고 그의 백성들도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마음일 뿐인 것이다. 예수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고 그의 제자들도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들의 말은 있어도 그들에게 있던 마음은 없으며 또 그들과 함께 했던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께서도 함께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때에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은 예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사랑을 배워야 하며 또 그 사랑을 따라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직접 명하신 것이었다.

 후에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죽음으로 자기의 사랑을 보이신 예수를 따라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돼야만 하며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돼야만 한다. 만일 이들이 그러할진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행하게 되겠는가?

 눈으로 보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그것을 떠올려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점점 일그러뜨리는 결과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 안에 세워나가는 것일 뿐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믿는 자들을 찾으시며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혹 그들이 혼자든지 둘이든지 셋이든지 기뻐하며 그들을 자기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신다. 또 그들만이 자기의 나라요, 백성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계명의 중요함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생각했다. 아니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를 생각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 것 같다. 그러할지라도 감사한 것은 오늘날 내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음이요, 또 몇몇 사람들이 나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준다.

 모든 거짓과 싸워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될 것이나 생명으로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면 이해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공허함과 두려움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며 기뻐할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또한 생명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랑을 마음에 품고 죽는다면, 이 사람을 어찌 미천한 인생이라 벌레 같은 인생이라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때에 경험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자리에 우리가 서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예수님의 자리였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강하여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깊이 이해하면서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둘 다 경험했다.

 그러나 이 두 번의 경험은 내게 있어서 만큼은 신비였고 기적과 같은 일들이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의도된 것이었으며 내 편에서는 절묘한 우연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일은 결코 우리가 경험하려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해야 되는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절묘한 우연 속에서라도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 지체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인 면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며 또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의 존재들이다. 하나님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는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처럼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여럿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결국 주님은 그것을 행하심으로써 이를 우리에게 전하셨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은 예수님의 몸을 고기처럼 뜯어 먹었으며 예수님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시고 취해 버렸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들었어도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으며 또 그들은 진리와 계시의 영에 취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에 취한 것이 되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욕심에 취해서 예수님의 몸을 곧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자기들의 의도대로 꺾어버린 것이다.

 한 세대가 지나면 생명의 말씀은 더욱 뒤틀려졌고 또 한 세대가 지나면 더더욱 심하게 뒤틀려진 것이다. 이 문제를 보는 자가 있었을지라도 뒤틀려짐을 멈추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바로잡고자 하는 자가 있었어도 사단의 더욱 큰 간계를 불러일으킬 뿐이었고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뒤틀려지는 결과만을 따르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똑같은 욕심을 가지고 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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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런 중에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마치 거름 속에서 더욱 강한 힘을 갖고 성장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생겨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사 내어주신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다. 예수님의 몸에 참예하는 이들은 교회가 되었으며 또 예수님의 언약의 피는 몸된 교회의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

 예수님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을지라도 모두 똑같은 이름 예수라고 불리며 또 여러 지체가 있을지라도 하나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한 모두를 한 이름 곧 예수라고 칭해주시며 또 그들 모두를 한 몸이요, 하나라고 칭하셨다.

 또 한 영을 받았으며 그가 오셔서 각 사람에게 지혜를 주시며 은사와 직분을 주셨다. 이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나 성령 안에서 여러 가지 직임을 얻었고 또 여러 가지 은사를 얻게 되었다. 은사는 이것이니 지혜의 말씀이요, 지식의 말씀이며 믿음이요,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이며 방언들 통역함이다. 또 직임은 이것이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은 은사의 첫째라 할만한 것이다. 이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지식의 말씀은 은사의 둘째라 할 만한 것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 하나님의 의로움을 아는 것 하나님의 행하신 위대한 일을 아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믿음은 은사라 하기 어려우나 성령께서 부어주시지 않으면 온전해 질 수 없는 특성 때문에 은사 중 세 번째로 꼽힐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며 그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의무가 있는 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여러 가지 훈련을 단계적으로 받은 자들이며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자기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 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며 구약적 배경에서는 사도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으나 신약에서는 단지 메신저로서의 역할이나 예언적 존재로서의 역할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여진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자이다. 교사는 어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 줌으로써 마치 양육하는 어미와 같은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지 세 가지 것만을 그려보았다. 돈의 가치의 하락, 사랑의 계명, 그리고 지체들, 이 세 가지는 성경에서 가장 표면적으로 제시된 예수님의 교회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예수님의 교회를 이 시대에 있는 교회와 비교하는 어리석은 일은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자기의 다니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전혀 다르며 정말로 성경을 그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그 교회를 알고자 했었다. 그 결과 나는 그 사람의 말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또 그 교회에서 그리 인정 받지도 못하는 자였다.

 그는 말하길 자기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자기 교회에서 가르치는 리더들은 정말 뛰어난 자들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도 현실의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현실의 교회가 타락하여도 그것을 분별할 교회의 모습이 그들 안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겐 현실의 교회만이 성경적 교회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릴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모험을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 교회가 망하면 함께 생명을 같이 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다짐을 한 자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이며 이들 중엔 거짓 형제가 있으며 가라지도 있으며 양의 탈을 쓴 이리도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거짓선지자들이다. 예수께서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가르치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내어쫓으며 사람들을 가르칠 것을 아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또한 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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