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 4.기도할지라, 찬송할지라, 예배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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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290회 14-06-28 17:14본문
4. 기도할지라, 찬송할지라, 예배할지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으며 또한 내가 배운 가짜를 버려야만 하기도 했었다.
가짜 기도와 가짜 찬송 그리고 가짜 예배 말이다. 가짜를 버리고 진짜를 얻는 다는 것은 사실 이론상으로는 상당히 쉬운 내용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것이 되기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게 아닐까? 나는 기도할 때에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었다. 그리고 꼭 아멘 이라는 말을 빼먹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찬송할 때에 주께서 나의 찬송을 들으실지 궁금했으며 수많은 이들의 찬송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두렵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다. 예배의 기원을 알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지금 드리고 있는지 또한 매우 궁금했었다. 만약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모르신다고 대답하신다면 나의 기도를 전혀 듣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지금까지 과연 무슨 짓을 한 것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배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실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려는 순간에 그것은 의심의 대상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혹시 내가 하는 기도가 찬송이 예배가 실제의 하나님께 어떻게 받아 드려질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 그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는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자로 나타나는가를 그려보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둘째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의 주체는 분명 나인데 내 안에서 기도를 찾지 못했으며 찬송을 찾지 못했고 예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나도 하는 것이었다. 또 찬송은 다른 사람들이 한 고백을 나도 그저 맞추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찬송만큼은 내게 있어서 상당한 부분에서 나의 고백이 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의 대부분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찬송마저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다만 자기의 마음을 찬송에 맞추려는 노력뿐이었다.
그리고 예배는 가장 큰 문제였다. 일단 예배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예배를 드리는 주체인 내가 갖는 나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예배의 긴 시간 중에 나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심지어 매우 졸리며 따분하다는 것이다.
한번은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한가지 소원을 비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구했다. 하나님!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예배시간에 졸지도 않고 딴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만을 가지고 예배를 끝까지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말이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 주체자로서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드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셋째로 기도와 찬송과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기 자신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 찬송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예배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은?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결론점은 결국 성경에서 끝이 나지만 그 해답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마저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실제 역사의 무대 속에서 많은 일들을 해 오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구약처럼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지 않는 것은 하실 수 없음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하나님은 다만 지켜보시며 좋은 열매 맺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하나님 알기를 기뻐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가만히 앉아서 나는 내 할 일을 마쳤으니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하고 말씀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보실 것이며 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시지 않겠는가?
또 그에게 간섭하사 그가 그릇 하는 것이 있으면 그를 치사 깨닫게 하실 것이요, 오히려 그 간섭이 너무 심하여 사람이 싫어할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내게는 그러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하는 자가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도 그를 괴롭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제 기도와 찬송과 예배에 대해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를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내가 주께 들은 기도와 찬송과 예배에 대해 이제 기록하겠다. 먼저 기도는 혼자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것도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먼저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나 사단이 우리에게 답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분명한 대상을 표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나 우리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 등 이처럼 지칭하는 대상이 불투명해서는 곤란하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그 이름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할 경우엔 소용없다. 결코 다른 이가 자신을 부른다고 착각할 수 없도록 정확한 대상을 지칭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헛된 기도를 가증하게 여김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혜를 따라 말해야 하며 진실함으로 자기의 중심을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을 따라 우리를 아신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하듯 듣기 좋은 말로 하나님께 아부성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는 당장에 하나님의 미움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의 중심에 어떤 말이 있는 지 먼저 살펴야 하며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따라 우리의 중심의 말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기도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동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마음 중심에 받아들인 자가 아니면 기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찬양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지만 주께 들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다만 전에 정리한 것만을 기록하겠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동반하는 고백이다. 주를 찬송하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결국이다. 그러므로 찬양이 없는 인생 그 자체가 허무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찬양을 드릴 때는 항상 그를 마음으로 느끼고 그 앞에서 온 맘과 온 뜻을 다해 찬양을 해야 할 것이다.” (1996년 10월 10일)
예배에 대해서는 사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많으며 또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강 기록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이를 깨달아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예배는 간단히 말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믿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면 예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는 자기의 삶을 예물처럼 가지고 나옴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찬양이 있으며 기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는 성실함으로 그 받은 것을 회중에게 전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주체는 각각의 개인이며 그 열납되는 것도 그 개인에게 있을 것이다.
내가 주께 들은 예배의 모습은 내 안에 있어도 그것을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보리라고 믿는 것은 주의 말씀을 인해서이다. 곧 혼자면 기도할 것이요, 둘이면 찬송할 것이며 셋이면 예배할지니라. 지금은 우리가 어리므로 모든 것이 불분명하나 곧 각 사람이 주안에서 장성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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