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 5.영원한 것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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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270회 14-06-28 17:15본문
5. 영원한 것 세가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중에서……)
영원한 것 세가지가 있다. 그것은 곧 믿음, 소망, 사랑이다.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이 세가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세가지는 또한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중요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세가지를 왜 영원한 것이라 하겠는가? 영생에 들어가는 자에게 있어 이 세가지는 반드시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이 세가지인 믿음에 관하여, 소망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알아가 보도록 하자.
믿음은 히브리 기자의 말과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함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되지는 않는다. 우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한다. 실상이라 함을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참모습, 참형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진정한 모습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난해하지 않는가? 바라는 것들의 진정한 모습이라니 과연 이것은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먼저 바라는 것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는 철학적인 물음이 된다. 진정한 원함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하는 철학적 문제는 결코 풀지 못하는 의문으로만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인간이 풀 수 없는 의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것이 믿음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히브리 기자가 한 이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을까?
과연 믿음이란 어떤 것이기에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일까?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한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이로 보건대 히브리 기자가 바라보는 믿음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믿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이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아도 그는 한결같이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또 어떤 이는 화평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한다. 단지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 그의 진정한 원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아름다운 이를 아내로 얻는 것을, 또한 행복하게 사는 게 진정한 원함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다시금 똑같은 문제를 묻게 된다면 이들은 대답을 달리 하게 된다. 그리고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또한 귀를 기울이게 된다.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이 임박하기까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결국엔 두려움 속에서 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가? 믿음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있는 내용은 이 부분인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에 대한 겉으로 드러나는 가짜였던 것이다. 진정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이들은 이 죽음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부활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죽음은 무엇이며 또한 진정한 영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신 게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벌을 내리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사단이 교묘하게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단은 육체의 죽음을 가리켜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간교한 자란 말인가? 처음부터 육체는 영혼을 담기 위한 그릇일 뿐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태에 빠져 버린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철저한 계획을 세우셨고 또한 이를 순차적으로 이루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기에 역사 가운데에 깊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진정한 원함에 대한 답을 하나님은 아셨고 이를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며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믿음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히브리기자는 이것을 보았고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한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진정한 모습은 사단의 간교함에 빠져 잃어버린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찾게 될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또한 영생의 비밀인 것이다. 아멘!
또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하는 데 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라 함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일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선뜻 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믿음은 보지 못하지만 원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증거와 같다는 것이다. 이 증거는 무엇이었을까? 믿음의 선진들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모습들 속에서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들이 믿음을 선택하고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걸 때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있는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이 그들에게 증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증거가 되는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증거란 무엇을 일컫는 말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증거란 보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자료나 물건 등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증거가 되는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확신했고 증거 된 믿음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는 지혜로웠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깨달을 만한 지혜를 가진 자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가 가나안 모레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처음 나타나신 여호와를 보고도 놀라지 않은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제 그 약속대로 행하심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서히 자라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로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소망은 절망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좋다. 절망에 빠진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있어 소망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자라면 어떠하겠는가? 날 때부터 절망이라는 함정에 빠져있는 자라면 또한 소망이라는 것을 바라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치 예정된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소망이라 함은 믿음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질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믿음이라는 기반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이 소망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된다고 한다. 영원한 천국에 이르러서도 이 소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망 또한 믿음과 같이 자기 안에 깊이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장 중에서……)
소망을 가진 자는 환난을 당해도 견디며 참아낸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이루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되는 줄 알기 때문인 것이다. 소망이 없는 자는 절망 속에서 허망한 것들을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지만 소망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지 참고 견뎌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환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반드시 거쳐가야 할 환난을 이겨내는 진정한 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사랑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소망의 기반이 되며 소망은 사랑의 기반이 된다. 소망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음 바 되었다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모두 영원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된다고 한다. 이는 믿음과 소망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 되기 때문인 것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이 사랑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며 반드시 간직해야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중요함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말을 살펴본다면 과연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큰 구제와 헌신적인 희생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바울이 한 이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닌 사실인 것이다. 이것을 이제 알아야만 한다. 왜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은사와 선한 말이 헛된 일이 되는 것인가? 그 대답은 간단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또한 선한 일을 하도록 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쉽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인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 많으신 분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와 같은 사랑이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 것이다. 처음부터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이제 그 영혼마저 자기와 같은 사랑의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서 13장 중에서……)
그러므로 사랑은 장성한 자의 것이요,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까지도 어린아이의 것이라 하겠다. 온전한 것 곧 하나님의 사랑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지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모든 것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 된다. 사랑에 관하여서는 할 말이 많으나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친히 가르쳐 주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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