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이단의 정죄 | 3.바울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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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046회 14-06-29 14:58본문
3. 바울의 싸움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것을 보시고도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렀을 때에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다.
바울은 어릴 적부터 성경을 알았고 항상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장성한 후에 어리석은 이단의 무리를 보고 그들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리라 하여 열심을 내게 되었다. 그는 그런 자기의 삶 속에 언젠가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임하게 될 때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의 일을 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한 빛을 보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임하셨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 때에 들은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인 것이었다. 바울은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으로 시력을 잃고 기력도 잃어 엎드러졌고 그 음성을 향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 물어 보았다. 그 음성이 이르기를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울은 모든 생각이 무너지고 무언가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을 볼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 드렸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가 기도할 때에 한 사람이 자기에게 안수하는 것을 보았고 그때 자기 눈이 다시 보이게 됨을 보게 된다. 아나니아가 들어와 그에게 안수하였고 그 때에 이상과 같이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고 그를 보내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셨으며 큰 기적과 이적이 있었고 또 많은 이들의 믿음과 사랑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에 바울은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그것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과의 싸움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형제들은 그를 기꺼이 영접하였다. 그 이튿날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는데 바울더러 이르기를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한다.
이 말은 마치 바울은 옳게 행하였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를 믿는 자들은 바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므로 조심하라는 것으로 들려진다. 아니면 예루살렘에 있어 예수를 믿는 자들 중 상당수가 바울이 가르치는 주의 복음에 관해 받아들이지 못하니 그들을 대하여 조심히 행하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은 이 문제에 관해 전혀 대책이 없어 보인다.
문제의 근원이 시작된 지는 이미 한참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주의 복음을 전하는 중에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가르친 것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들과 심하게 다투었고 변론하였다. 결국 바울은 이 문제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다.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놀랍게도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의 변론으로 이방인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다 하였고, 다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 것만을 말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편지를 보내어 이방인들을 안심시켰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사도행전 15장 중에서…)
실상 자기 마음대로 가서 이방인들을 괴롭힌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있어 바울을 정죄하였고 더욱 바울을 이단자로 몰아가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사도들과 장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유대인들은 결코 율법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을 버리시고 이방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미천하고 더러운 이방인들, 율법이 없어 죄와 허물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보기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 이방인들이 율법을 배우고 할례를 받아야만 조금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래야만 하나님을 믿는 조금 깨끗해진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교만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대로 판단하시는 분일진대 이 사람들을 어찌하시겠는가? 그들이 판단한 율법대로 오히려 그들을 다시금 판단하실 것이다.
이들이 이러함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퍅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보고자 할지라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는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가지고 운영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온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전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전부터 바울 죽이기를 꾀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자 소란을 일으켜 바울을 돌로 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기회만을 주게 될 뿐이었다. 이제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자.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2장 중에서…)
바울의 말은 명료했다. 유대인들은 주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겠고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베드로의 이름도 팔고 요한의 이름도 팔며 또 영을 받았다고도 하여 이방인들을 미혹했고 다른 복음을 전하며 또 다른 영을 받게도 했다. 바울은 변론했으며 싸웠다.
바울의 수많은 서신은 단순한 문안이 목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힘써 싸우라는 내용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전하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과 싸웠다. 왜 바울이 싸워야만 했던가? 과연 바울이 싸우기를 좋아하고 변론하기를 재미있어 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렇다! 바울의 싸움은 진리를 거스려 대적하는 모든 자를 향하여 한 것이며 또 많은 영혼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해야만 구원을 얻으리라’하였지만 바울은 결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또 할례를 행하면 율법의 종이 된다고 반박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율법을 다시금 지킬 필요가 없으며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천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는 율법을 지키려 하고 있으며 십계명과 십일조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려 하고 있다. 이제 바울의 책망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2, 3장 중에서…)
바울의 증거가 어려운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었으나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오직 영의 새로운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로마서 7장 8장에서 증거한 것을 기억해보자.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마치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죽음으로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음 같은 것이다.
그렇다! 율법은 예수로 말미암아 그 역할을 다했고 그 목적을 완전히 이루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또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바울의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영의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하며 믿음으로 이루어진 삶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벗어 던질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벗어 던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의 모양을 깨뜨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었다. 수많은 시간을 통해서 지켜져 온 율법을 그들은 과감히 깨뜨리지 못한 것이다.
지키지 않으면 사망이라는 벌을 받아야 하는 무서운 법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단지 예수의 죽으심 하나로 모든 제사를 폐하고 십계명을 버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십일조와 첫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에겐 예수는 큰 위안이 되기엔 충분했지만 율법의 완성자로 받아들이기엔 아마도 충분치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의 교회 또한 그 이유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자기들이 지켜온 교회의 관례를 깨뜨릴 용기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성경과 부딪힐지라도 교회는 용기 있게 거짓을 버리기엔 너무나 거짓을 많이 쌓아 온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기엔 그 오류가 너무 깊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지도 아니했고 또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이룬 믿음의 삶도 아닐진대 어찌 하나님이 이들을 향하여 자기 백성이라고 인정하시겠는가? 사람이 많다고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주시는 분이신가? 단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기뻐하시는 분이셨던가?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을 아시며 그에게 속한 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속함을 아는 것이 마치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음을 가지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이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한 가지는 마르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과실을 많이 맺음을 인하여서일 것이다.
이제 알라! 결코 바울의 싸움이 헛되지 아니함 같이 우리의 싸움도 헛되지 아니할 것이라.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분이 아니시면 우리의 공의가 헛된 데로 돌아갈 것이나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분이시면 불의한 모든 이들이 그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만일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미친 자요, 어리석은 자가 되려니와 만일 그리하신 것이면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지 아니하여 열매 맺지 아니한 모든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바깥 어두운 가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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