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이단의 정죄 | 4.부요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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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5,120회 14-06-29 14:59본문
4. 부요한 교회
콘스탄틴은 대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는 대제이며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았고 그 결과로 많은 권세와 안정을 누렸을 뿐이다.
그는 사단의 유혹에 이끌렸으며 사단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와 명예와 부를 선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으며 사단의 뜻대로 점차 망해 갔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하셨으나 핍박이 그치고 자유와 부를 얻었을 때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들 욕심대로 행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각 있는 자라면 분명 느꼈을 만한 것이었고 또한 총명 있는 자라면 보고 깨달아 알았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흘러 가버린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을까? 또한 그 역사에 흥분하며 분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느꼈었고 흥분한 마음으로 이에 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나의 분함은 그 흘러간 역사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 시대의 뒤틀려진 기독교를 향하여 분함을 가진 것이다.
사단의 간교함을 아는가? 또한 사단의 지혜로움을 알고 있는가? 사단의 간교함이 지혜로움으로 표현돼질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행한 일들이 실로 놀라우리만큼 계획적이고 체계적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가 행한 일들을 아는 자라면 결코 그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와 접촉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그가 역사 속에서 행한 일들을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시대는 심히 어두웠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핍박이 있었기에 그렇게 어두웠던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자신이 사자의 밥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일지라도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죽음을 준비함으로써 믿음을 지켜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또한 그 순교자들의 믿음과 고백들이 어떠했는지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큰 위안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망의 두려움이 모든 이들에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기다리면서 언젠가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자기들을 구원하시리라고 믿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지쳐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점차 믿음을 얻는 길에 꼭 핍박이 따라야만 하는지 또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핍박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핍박 받는 것은 결코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은 점차 지쳐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들에겐 어쩌면 믿음의 어린아이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단은 이미 너무나 많은 성도들을 죽여 버렸던 것이다. 사단은 지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았다. 핍박으로 죽어간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인하여 용기와 위로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었지만 언젠가는 자유와 평안을 얻으리라고 기대하는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을 그는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지쳐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헛된 소망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에 그는 또 하나의 지쳐있는 인간을 보고 지혜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구원을 전파한다. 십자가를 보이며 ‘자! 이것을 가지고 정복하라.’라고 한다. 콘스탄틴은 하나님의 천사를 본 줄 알았고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쳐 있는 마음과, 자유와 평안을 얻으려는 치우친 마음으로 그 거짓된 영 사단을 하나님의 천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로 교회는 지상으로 나왔으며 큰 부자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교회가 된 것이다. 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크신 사랑을 깨달아 알고 기뻐했던가? 아니다! 그들은 교회가 콘스탄틴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어 주는 새로운 종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기뻐했을 뿐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자가 권력을 얻게 되었고 교회가 인정하는 자를 또한 국가도 인정하게 되었다. 성공의 중심에 교회가 처하자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사단의 간교함이 꾸민 일이었고 그 계획은 완벽한 성공으로 결론지어지게 된다.
사단의 간교함을 드러내는 자가 없었으며 또한 이를 증거하는 자도 없었다. 역사 속에서 나는 그 외침이 있었다고 듣지 못했다. 아무리 찾아보았어도 이를 얻지 못하였다. 그처럼 신실하던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토록 어이없이 망하게 되었던 것일까? 사단은 이미 실제적인 믿음을 소유한 모든 이를 죽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역사가 외면할 정도로 그 외침이 너무 작았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마 그때에 분명한 외침이 있었을 것이다. 사단의 간교함과 어리석은 교회를 책망하는 소리가 분명코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기록 속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누군가가 이 사실이 전해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사단의 뜻대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A.D 313년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의 한 종교로서 인정 받게 되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의 핍박이 이제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죽음으로 권력 투쟁이 빚어졌으나 콘스탄틴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밀비안 다리』전투가 끝난 직후 콘스탄틴은 하늘에서 불타는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 그 불타는 십가가에는 헬라어로 ‘이것을 가지고 정복하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콘스탄틴은 십자가로 자기의 상징을 삼았으며 그의 군사들도 십자가의 기치 아래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의 개종은 곧 교회에게 있어서의 엄청난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예배를 위하여 교회라는 건물이 건축되었고, 감독과 설교자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일요일은 안식일로 인정되어 업무가 중단되었고 군인들도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제국의 가장 훌륭하고 높은 지위들이 주어졌고, 교회는 기증이나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엄청난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지도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많은 이교자들이 개종하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교회의 감독들의 회의와 교회 대표자들의 모임을 소집하였으며 이러한 모임을 자신의 이름으로 주재하였다. 그는 모든 교회의 주관자가 되었으며 완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므로 A.D 313년은 기독교의 최악의 날 일뿐인 것이다.
이런 날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를 핍박했던 역대의 어떤 황제보다도, 그 미친 네로의 광기보다도 더욱 더럽고 패역한 황제는 콘스탄틴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제라 불린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는 살아가지 않았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이 살아갔던 자이다. 그는 죄 사함을 위하여 물세례도 성령의 세례도 받지 않은 자이다.
그가 죽기 직전에 물의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정결케 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의 긍휼이 그를 용서하셨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지 아시며, 또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어떻게 멸시하였는지 보아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그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가 어두움에 내어쫓기는 것이 마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 것이다. 아멘!
이제 사단의 간교함의 깊은 것을 또한 보아야만 한다. 사단은 이러한 혼란한 시대 가운데에서 또 하나의 간교함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모든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만들어야만 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먼저 이단이라는 당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를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게 한다. 예수님이 단지 피조된 존재이며 그 안에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리우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데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때엔 분명 엄청난 배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코 영적인 세력인 사단이 이 아리우스를 충동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리우스가 행한 일로 인하여 콘스탄틴은 니케아에서 교회의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결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조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니케아 신경』인 것이다. 과연 사단이 목적한 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단의 간교함의 더욱 깊은 것은 이 『니케아 신경』에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교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이 교리의 결과이기도 하며 표면적으로 지키지 않는 모든 이를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이 교리의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이 교리는 이것을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만남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었다. 사단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교리는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마음대로 확대되고 적용되었으므로 절대적인 권세로 자리 잡아 가기도 했다.
교리를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협박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 위에 있는 자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었다. 사단은 그것을 계획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이루어 주게 된 것이다.
많은 회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도시의 감독들이 보다 작은 지역 교회들의 감독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로마,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들은 스스로 가장 높은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 대감독(Patriarch)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하려 하였고, 또한 이들 대감독들 사이에서도 더욱 높아지려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때에 로마의 대감독과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은 가장 큰 세력들이 되었으므로 이 두 사이의 싸움이 계속 되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여러 가지 이유로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부터 이 싸움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교회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25년을 살며 사역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시작했으며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여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 권위를 주장하게 된다. 6세기 중에 로마의 대감독은 교황(pope)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교황(pop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파파(papa)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곧 교황은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이며, 교회 안에서 최고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교황의 탄생은 사단이 자신의 오른팔을 얻음과 같은 것이리라. 교황이라는 자리는 처음부터 인간의 욕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결코 사단의 뜻을 거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욕심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약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사단은 그에게 교리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교황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력은 실제로 황제를 무릎 꿇게 만들었으며 또한 황제를 폐위시키기까지 했다. 황제라는 절대 군주는 사라졌어도 교황이라는 보이지 않는 절대 권력은 사라지지 않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이 뒤에서 그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사단이 영원한 불 못에 처할 때에 그도 함께 가지 않겠는가? 계시록은 이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로마의 교황들과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들 사이의 싸움은 동. 서방 교회로의 분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서방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의 희랍 정교회인 것이다.
프랑크 샤를 마뉴 왕이 교황 레오 3세의 손에 의해 왕관을 수여 받았을 때에 이미 망해 버린 서로마는 신성로마제국으로 다시금 태어났다는 표현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방 로마 카톨릭의 교황은 동쪽의 모든 교회와 황제마저 굴복시키려는 야욕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단의 이름으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정치적 야욕으로 가득 차게 만든 장본인이 콘스탄틴이 아님을 이제는 알 것이다. 그는 그렇게 지혜롭고 간교한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단은 단지 그를 이용한 것이며 자신의 간교함과 지혜를 가지고 그를 약간 물들였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교회는 완전히 망하고 폐하여졌을까? 과연 그러할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교회는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 의해 완전한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웅장한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으며 값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교회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감독들은 예배를 위하여 새하얀 겉옷 위에 밝은 빛의 망토를 걸치고 나타났다. 상상해 보라! 지금의 교회와 별 차이가 없으니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극도의 타락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진리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참된 믿음의 길을 알기 위한 고민과 기도 속에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걸림돌과 함정들은 소경들에겐 치명적인 것이었지만 소경이 아닌 밝은 빛에 다니는 사람들에겐 단지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시련일 따름이었다. 교회의 심한 타락은 오히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진리를 알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해 주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보았듯이 몇몇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된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고, 혹 그들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대로 그들은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었다.
만일 이 시대의 교회가 조금 타락한 모습이었더라면 나는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을 만큼 충분히 타락했었다.
부요했던 그 시대의 교회를 기억해야 함은 그 시대를 알므로 지금의 이 시대 또한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을 때에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는가? 그들은 로마의 황제 아래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찾았으며 그 무덤을 장식했고 또 그들의 생애와 죽음을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은 이 믿음의 사람들을 위하여 추도 예배를 그들의 무덤 앞에서 드렸으며 심지어는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기도 했다. 마치 사울이 사무엘에게 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순교자들뿐만이 아니라 감독들까지 우상화하였으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으로 추앙하고 예배를 그 마리아에게조차 드리게 되었다. 그들의 우상은 처음엔 가정에서 나중엔 교회로 들여오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감독자들은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고 소경으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을 뿐이었다.
참으로 우습지 아니한가! 이 시대의 교회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함을 인하여 지나간 믿음의 선진들을 기리며 그들의 말을 즐겨 읽지 아니한가? 또 어떤 목회자가 일어나 뛰어난 말로 설교를 하면 그에게 달려가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고 하나님처럼 그를 섬기지 않는가? 심지어 교회 안에는 우상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가정에도 잡다한 상들과 우상들이 있다.
이런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말과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에 있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어도 말했다고 주장하며 보내지 않았어도 보냄을 받은 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옛적에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심은 여전하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주께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믿으라. 성경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였고 또 “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으라” 하지 않았던가? 내가 주의 음성을 듣고 그의 말씀에 힘입어 그의 행하신 일들을 보고 깨닫는 것이 기이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미 모든 것을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만나고자 하면, 또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면 그가 숨기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알게 하시며 친히 만나 주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사단은 결코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일해 왔다는 것이다. 그가 행한 일을 알고자 하면 너무나 많아 기이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까? 다만 그가 속이려고 하며 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모든 길을 막고자 했다는 것을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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