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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이단의 정죄 | 5.학문의 신앙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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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183회 14-06-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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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학문의 신앙 칼빈




 1509년 빈은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노용 주교에 대한 비서이자 소송 대리인이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칼빈은 상당히 부요로운 환경 가운데에서 귀족적인 예절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뱃사람이었던 그의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아버지는 무언가 큰 꿈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아버지가 공증인 자격증을 따고 교회의 사무장이 되었을 때부터 그의 집은 상류층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학업성적이 매우 뛰어났으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칼빈을 위하여 가장 좋은 직업으로 성직자가 되도록 준비를 했다. 결국 칼빈이 12세 되던 때에 그의 아버지는 주교로부터 칼빈을 위하여 성직 임명을 약속 받게 되었다. 칼빈은 어렸으며 그의 아버지를 거절할 수 없었고 또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파리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칼빈은 파리대학에서 5년을 보내며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주교간의 사이가 악화되자 칼빈은 19세 때에 신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때문에 그는 파리를 떠나 오를레앙으로 가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칼빈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다만 아버지의 소망을 따라 신앙을 배웠으며 신학을 하게 된 것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주교 사이에 있는 갈등과 타협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신학을 하면서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교회의 모순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다만 근심과 고민 속에서 교황에 대한 의문만을 남긴 채 신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괴로움 속에 있었던 그였기 때문에 신학을 포기하고 법학을 배우기 위해 오를레앙으로 떠나던 그 날은 오히려 그 자신에게 있어 더욱 큰 기쁨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칼빈은 법학을 매우 잘 소화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인본주의,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강한 매력을 느꼈으며 그것들을 아주 빠른 속도로 이해해 나갔다.

 그에게 있어 법학은 원했던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의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파리로 다시금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532년 그가 23세가 되었을 때에 그는 자기의 배운 학문을 기반으로 『세네카의 관용론주의』를 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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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 칼빈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으며 또 잘 소화해 나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웬만한 이름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읽었으며 또한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금 용기를 내어 신앙에 대한 의문을 법학적인 이성을 가지고 분명한 시각으로 풀어 보기를 결심한다.

 그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과 싸우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임하여 교회에 대한 개혁을 맡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꺼려할 수 밖에 없었다.

 칼빈은 올바른 이성과 깨끗한 양심으로 성경을 읽었으며 어거스틴의 글과 존 위클리프의 글들을 읽었으며 또한 루터의 글들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칼빈은 성경과 믿음의 글들을 읽었고 이로 인하여 갑작스런 회심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성경 속에 계시된 주의 말씀을 인하여 로마 카톨릭이 얼마만큼 잘못되고 뒤틀려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교회와 결별하기 싫어했다. 칼빈의 절친한 친구 콥이 파리 대학의 총장이 되자 칼빈은 콥을 여러 방면에서 도와주게 되었다. 콥이 취임 연설에서 개혁의도를 밝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칼빈은 같은 개혁자로 인정되어 그들은 파리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한 칼빈은 27세 때에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게 되었다. 기존에 나와 있는 개신교적 입장에 대한 책들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조직적으로 기술된 『기독교 강요』는 곧바로 불어로 번역되었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칼빈은 그의 일생을 학문적인 연구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스트라스부르그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가던 길에서 격렬한 전투를 만나게 되어 할 수 없이 제네바를 통해서 우회하게 되었고 그때 제네바에서 윌리엄 파렐이라는 한 사람을 알게 된다. 파렐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주도한 끝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를 버리고 새로운 개혁 교회를 이루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있음을 그는 깨닫게 된다.

 로마 교회는 모든 조직과 예배와 교리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새로운 개혁 교회는 도무지 어떤 형태를 이루어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 때에 칼빈이 제네바를 지나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이 칼빈을 보내어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을 믿었다. 그는 그런 확신에 찬 믿음으로 칼빈을 설득했으나 칼빈은 끝까지 그 제의를 거절했다.

 파렐은 큰 목소리로 책망하며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선언한다. 당신은 자기 공부를 구실로 하고 있다. 더욱이 당신이 우리와 함께 여기서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것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노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소리질렀다. 

 그 때에 칼빈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손을 펴시고 그를 사로잡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칼빈은 제네바에 머물면서 개혁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개월 뒤인 1536년 10월에 로잔에서 로마교의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회가 있었는데 칼빈은 파렐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이 토론회는 로잔의 시민이 로마교 신앙을 지키느냐 신교의 신앙을 택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지을 만한 중요한 모임이 되는 것이었다. 그 5일째 예수회 신부가 로마교의 성찬론을 교회 전통에 입각해서 주장하였는데 그에게 반박하여 신교의 해석을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에 칼빈이 일어나 기억을 더듬으면서 교부들의 학설들과 성경을 인용하여 신교의 해석을 논증해 나갔다. 그 때에 듣는 모든 이가 칼빈의 엄청난 기억력과 논증하는 다양한 지식들을 듣고 크게 놀라게 되었다. 뒤이어 프란시스회 신부가 말하기를 ‘나는 이 교설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으며 큰 확증을 받았습니다. 이 진리는 복음적임을 압니다. 나는 수도사의 옷을 벗고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로잔의 시민들은 신교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제네바에 있어 신교를 선택했던 이유는 어떤 면에서 정치적인 이유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하는 모든 것을 바로 시행해 나가기를 원했다.

 제네바는 하나의 종교적인 도시로 지역 자체가 하나의 교회로 간주되었다. 칼빈은 우선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세 가지 것을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첫째로 성찬이었다. 로마 교회의 미사 대신에 매달 성찬을 하도록 했으며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를 제외하고 시행하도록 했다.

 또한 시의 모든 구역을 나누어 분배해서 모범이 될 만한(도덕적으로) 몇몇 사람들을 세워 각각의 지역내의 사람들을 감시토록 했다. 이 사람들의 도덕적 위반에 대한 회개를 거절할 경우 기독교인들의 교제로부터 거부되어 파문될 것을 정하였다. 두 번째 단계로 신앙 고백이다. 제네바의 모든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강요 받았으며 심지어 시의회의 구성원들도 공적으로 신앙 고백을 해야만 했다.

 세 번째 단계로 교육과 훈련이다. 칼빈은 성인들을 위하여는 신앙 고백을 시켰으며 어린이들을 위하여는 요리 문답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시도는 이행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그 후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3년간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된다. 제네바는 3년 만에 칼빈을 다시금 받아 들였고 칼빈의 개혁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칼빈’ 이 한 사람으로 개혁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발전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기독교 강요와 제네바에서 이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개혁 교회의 모습은 세계 교회로 발전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만들어 주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한 칼빈을 욕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를 비난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놀랍게도 그에 대한 악평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악평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왜일까? 그를 울며 잡아먹을 아이를 찾고 있는 귀신, 또는 이기주의적 광신자, 교리적 인간 증오자 그리고 악마적 신과 같이하는 비인간적 독재자 등으로 불렸던 것이 이제는 그릇 되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곧 사단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단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결코 그는 그렇게 한가하게 놀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영원한 생명이 불 못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간교함을 나타내었고 우리는 그의 간교함을 또한 깨달아야 한다.

 존 위클리프가 나타났을 때에 사단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극도로 타락한 자기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금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단은 위클리프를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위클리프의 주위 사람들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다시금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사단은 결국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로마 교회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서게 될까 염려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간교함을 따라 한 가지를 계획하였고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해 또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사단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로 했다. 로마 교회가 아닌 좀 더 성경과 가까우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할 새로운 교회를 그는 계획했던 것이다.

 그는 칼빈을 보았다. 그리고 사단은 칼빈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이루기로 그는 결정했던 것이다. 사단은 칼빈에게 법학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주교를 이용했다. 결국 칼빈은 사단의 의도대로 이성에 눈뜨기 시작했고 학문을 통해 신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그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주었고 칼빈은 자신이 엄청나게 뛰어나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칼빈의 이성이 완전히 굳어졌을 때에 사단은 다시금 그의 아버지를 죽게 함으로써 그에게 신앙에 대한 욕구를 갖도록 유도해 나갔다. 학문적 이성으로 로마 교회를 판단하도록 이끌었으며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교회의 상을 심어 주었다. 그것이 개혁 교회의 상인 것이다.

 칼빈은 이성을 통하여 성경을 이해했으며 어거스틴과 루터와 많은 개혁자들의 의견을 수용해 나갔다. 그러나 루터는 칼빈을 받아 드리지 않았고 그에 대해 하나님의 종이 아님을 증거한 바가 있다.

 칼빈의 갑작스런 회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한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학문적으로 로마 교회의 그릇됨을 확신함에 있어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해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성으로 보건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요소를 안고 있으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고 자신이 성경에 확신을 갖고 있으나 주께 확인 받은 적이 없는 이성의 기반에 의한 확신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 받은 많은 사람들의 글들에 상당히 의지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므로 그는 평생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그의 발걸음을 제네바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파렐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만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약했던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로잔의 공개 토론회에서 적이었던 로마 교회의 신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신교로 개종을 한 것은 그에게 있어 엄청난 감동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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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것이 사단의 간교라면 그것 또한 엄청난 역사가 아니겠는가? 칼빈은 계속적인 불안감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자 했으나 사단은 그를 이끌었고 자기의 계획을 이루도록 역사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와 직분으로 모든 연약한 지체들을 서로 돌아보아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또한 그 가운데에서 자기의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령께서 주신 은사와 직분들로 말미암아 지식과 지혜에 풍요로워지며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그 자리에 조직을 만들었고 법을 만들었으며 또 교육을 만들었다. 칼빈은 성경에 근거하였고 양심에 근거하였으며 이성에 근거하였으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고 예수의 이름으로 살지도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을 읽는 자들은 기록한 자의 받은 감동이 무엇인지 알려 해야 하며 그들의 받은 감동을 함께 받기 위해 주께 기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령의 인도함 없이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나아간다면 다만 빠질 수 밖에 없는 깊은 함정들을 향하여 그대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를 이미 허락하셨고 이 또한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

 오늘날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 나의 지혜와 이성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을 기다렸었다. 또한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을 확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주님께서 답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 묻는 것으로 이를 확인하려 하였었다. 주께서 가르치시지 않은 것을 혹시 확신할까 염려하며 그렇게 기도했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주께서 먼저 그것을 내게 알게 하셨고 그로 인해 내가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혹 주께서 나를 살리기로 하시면 살겠고 죽이기로 하시면 죽지 않겠는가? 다만 주께서 진실함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에 단지 그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이제 내게 더욱 큰 확신이 있으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몇몇 사람들을 위함인 것이다.

 알 것은 가룟 유다의 망함은 주의 뜻이 아니라 스스로의 악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는데 쓰는 것이요, 혹 속이는 마음이나 악한 동기로 행하는 것이 있나 스스로를 살피는 데 쓰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이나 이성에 의지하여 보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이성으로 자신을 망하게 할 따름일 뿐이다.

 본래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최고의 것에 호소하는 자가 하나님보다 사단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에 하와의 이성에 호소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예수의 시험 당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예수의 이성에 호소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러므로 이성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필 때에 냉철함을 가질 뿐 성령의 감동과 그의 가르침으로 다시금 회복될 지혜와 총명 안에서는 이성이 아닌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시각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 할 때에는 이성을 따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을 따라 알아 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곧 주의 거룩한 영으로 알아가야 하는 것이 된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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