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권 이단의 정죄 | 6.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281회 14-06-29 15:00본문
6.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
이단에 관한 이야기에 있어 역사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상당히 강한 설득력이 담겨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역사의 사건들을 대하게 될 때에 다만 어렵다고만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내용의 어려움보다도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더욱 복잡해지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의 부족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시각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제의 역사적 사건을 관찰하는 것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의 내용이 아주 긴 시간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보통 이런 방대한 이야기를 그리 쉽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를 먼저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 기본적인 준비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인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 우선 필요한 것은 우리의 노력보다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일 것이다. 죄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기반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단의 정죄라는 역사를 대략 정리해 보고자 한다.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 다시 말해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워진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다양한 형태이기도 하며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의 네 가지 밭이 사람들의 마음인 것처럼 이 또한 예수님의 독특한 지혜로써 표현된 일곱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모든 교회를 포함한 것이며 각각의 교회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련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외엔 하나님의 교회가 없으며 다른 교회는 모두 거짓 교회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곱 교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되겠고 또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그 일곱의 첫째는 에베소 교회이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교회란 성전이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써 믿는 자들의 육체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믿는 자들의 모임과 함께 하시므로 이 모임 또한 교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만 각각의 구성원들에게도 성령께서는 그 책임을 두고 있다.
물론 그 결과도 그들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기는 그에게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얻게 하시리라 하였으니 이 생명나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나무가 되는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신다 하였으니 에베소 교회에서 시험을 이기는 자는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 받은 교회가 된다. 그것을 이루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수 많은 시련이 따랐고 문제들이 생겼었다. 그러나 에베소는 그것을 참았고 견디었으며 승리를 얻어내어 하나님의 교회로써 인정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것을 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또한 악한 자들을 용납치 않아야만 했다.
교회 안에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자가 있었으므로 또한 그들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믿음은 모든 거짓을 용납치 않으므로 결국은 그것 모두를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처음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하여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다시금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무엇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신 것이었다. 곧 그것은 예수의 새 계명이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 처음 사랑이란 오직 예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랑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처음 사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를 맡은 교회의 청지기는 이 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절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더욱 중요한 것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님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이 문제는 맡은 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교회 전체의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께서는 맡은 자에게 이르시기를 네 촛대를 거기서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교회를 다른 자에게 맡기시겠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부정 당할 수 밖에 없는 거짓 교회가 될 뿐인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 속에서 한가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니골라당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니골라당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또한 주께서 미워하신다는 그들의 행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야고보의 편지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에베소 교회는 주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행함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심을 얻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지만 결국 주님의 평가는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이를 무시하게 된다면 그는 성령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니골라당과 같이 행함을 부정하는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실 만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의로우심을 그대로 얻게 되나 단지 이름만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의로움을 배우게 되는 것이며 또한 그 의로움을 마음에 받아들여 간직하게 된다. 의로움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심령에 부음 바 되는 것이나 행위로써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또한 헛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의로우심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며 자신 또한 의로움 가운데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금 서게 된다.
그 일곱의 둘째는 서머나 교회이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처음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에베소 교회는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들보다도 사랑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승리하게 되었을 때에 또 하나의 시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그것은 더욱 강도 높은 핍박인 것이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으며 또한 그것을 견뎌내야만 했다. 또한 내적으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핍박을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의 훼방도 있었다. 조금 부드럽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생각은 사실 하나님께로 난 것이 아니요, 사단에게서 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로 인하여 흔들렸으므로 교회는 큰 괴로움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의 맡은 자에게 전하시는 말씀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이 훼방의 무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 사단의 종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큰 환난이 있을 것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주께서는 이 시험 가운데에서 생명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라 권하신다.
믿는 자들은 환난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만 한다. 주께서 이기는 그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고 또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 약속하셨다. 이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가 더 이상의 교회로써 인정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환난을 이기지 못한 서머나 교회가 둘째 사망의 해를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은 믿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신앙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그 일곱의 셋째는 버가모 교회이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안디바의 죽음을 보았어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교회는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환난 후에 오는 안정감을 인하여 기뻐하였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됨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계략이었으며 간교함의 열매였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곧 사단의 거하는 곳이 되었어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여호와 앞에 멸망케 하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발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백성임을 알고도 발락이 준 재물을 인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길 원했다. 이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발람을 죽이시려 했으나 발람의 나귀의 충성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발람은 발락에게 가르쳐 이르기를 우상의 재물을 드려 이스라엘에게 주면 그들이 기뻐하여 먹을 것이요, 그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자기의 백성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버가모 교회 중에는 사단의 차려놓은 상을 보고 기뻐하여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회심은 그들의 승리의 결과라고 생각했으며 많은 예물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새롭게 유입된 어린 자들을 핑계로 믿음에 대한 환란이나 많은 결단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욕심은 니골라당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게서 보여 주었던 수많은 결단과 궁핍 그리고 열심은 이런 니골라 당을 미워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버가모 교회가 큰 환란을 지나고 난 후에 다시 한번 이 욕심을 따라 난 자들에 의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들을 향하여 직접 검을 들어 싸울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가운데 있는 버가모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줄 것을 약속하신다. 이 만나는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광야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영원한 양식이다.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감추어진 만나라 하였으니 아마도 말씀 중에서도 감추어진 어떤 부분들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을 얻게 된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 악한 자들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말이다. 그러므로 흰 돌 위에 쓰여진 자기의 새 이름은 어떤 영적 성장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직분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이름은 자기의 새로운 삶을 제시해 주는 어떤 직분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가모 교회는 하나님의 영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으로서의 교회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에서 서머나 교회로의 성장, 또한 서머나 교회에서 버가모 교회로의 성장,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서 두아디라 교회로의 성장, 이 속에서 무언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교회 자체의 성장보다는 그 교회에 속한 이들 중에서 이기는 그들의 성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기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영생을 두고 하는 엄청난 싸움,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이 싸움이 왜 그리 치열한 지 우리는 참으로 깨달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일곱의 넷째는 두아디라 교회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는 버가모 다음의 교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알았으며 또한 그들의 행위도 놀라우리만큼 안정적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곧 그것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에 관한 것이다. 이 이세벨에 관하여 계시록은 상당히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우선 이것을 기억해 보자.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줏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이세벨은 이 세상의 많은 권력과도 결탁되었고 또 많은 종교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자이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비밀이라 함은 은밀히 숨어서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가장 거룩하며 진실하여 하나님의 대리자로 서 있으나 실상은 예수의 증인들을 죽이고 갖은 음행을 은밀한 중에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 큰 바벨론이라 함은 옛적 모든 언어가 하나일 때에 사람들이 지상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 땅에 쌓은 성 바벨론과 같이 하늘 끝까지 쌓아 올린 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벨론처럼 그들의 죄악을 쌓았고 또 바벨론이 무너진 것처럼 무너질 것이다. 또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으니 이는 땅에 있는 어떤 음행이나 가증한 것들보다도 그들의 더욱 가증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며, 또 그에게서 나온 자들이 같은 음행을 행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가 성장하여 이 이세벨과 부딪힐 때에 당하는 타격은 엄청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가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비밀스러운 이 가증한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가르쳐야 하며 그들의 음행을 배우지 못하도록 엄히 경계해야만 한다.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따라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새벽 별을 주신다고 했으니 깊은 밤이 지나 새벽을 알리는 빛을 받게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일곱의 다섯째는 사데 교회이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는 큰 환난을 겪은 다음의 교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것이라 한다. 이 말씀을 기억해 보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환난을 통해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둘이다. 주는 합당치 못한 자들에게도 기회를 다시 주신다. 주께서는 그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주를 알면서도 타협한 자요, 모든 것이 희미해져 버린 상태에 있는 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환난은 주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성장의 한 단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일곱의 여섯째는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환난을 이기고 승리한 교회에게 주님은 열린 문을 허락하신다. 이것은 구원의 문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라 하겠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는 이 문은 주께서 산상에서 두드리라 했던 그 문과 같은 것이다. 구하라 하셨던 것은 죄사함이요, 찾으라 하셨던 것은 주의 뜻일 것이며 두드리라 하셨던 것은 이 하늘의 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남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주의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믿음의 사람들 중에 주를 만나지 못한 자도 또한 드물었으리라. 하늘의 문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이 환난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후에라야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겠지만 과연 그 문이 이들에게는 확실히 열렸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기는 자에게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함은 그들의 직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전은 어린양과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또 성전을 두르고 있는 성은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12진주 문이 있는 이 예루살렘 성은 두 증인에 의해 완성돼질 것으로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또 성경은 성의 중심에 있는 성전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성전의 기둥이 갖는 위치와 직분은 결국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 분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상태의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일곱의 마지막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교회의 완성적인 단계를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씀의 내용을 깊이 있게 생각해보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 부분이 혹독하여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생각이 그릇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주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생각하여도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교회를 향하여 강한 말로 책망을 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온전하기를 원하셨고 완전함을 이루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만족하였고 자족함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주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강하게 책망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과연 그러했을 것이다. 주께서 보시기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충분하였어도 주께서 보시기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완성적인 단계를 보여주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어서 이러한 책망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이제 주님의 권면을 들어보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어떤 것일까? 또 흰옷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갖춰야 할 완성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주께서 직접 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께서 권하신 세 가지가 모두 사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보자. 이는 그것 모두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러하다. 주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사서 먹고 마시라 했던 것처럼 이제도 값없이 주께 그것들을 사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예수께서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신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도 모든 것을 이루어야만 하는 교회라는 것을 또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성경해석은 매우 부족하며 알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이를 알기 위해 주께 많이 기도 드렸었고 많은 계시들 속에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양육에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를 알 수 있었던 것이며 계시록의 서두에 이 일곱 교회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계시를 아는 일이 중요할 지라도 양육보다 앞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은 인간의 성장이기에 계시의 시작에 또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이 양육에 관련된 부분을 보이셨던 것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성경 해석은 감람나무 2권을 통해 다시금 보일 것이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것은 단지 대략적인 것일 뿐이다. 반드시 일곱 교회는 다시금 완전하게 해석돼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