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권 성경해석1 | 1.성경해석 첫번째 -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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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5,390회 14-06-29 15:02본문
1. 성경해석 첫번째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논제의 이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은 아담이라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 한 사람이 모든 이의 아비가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고 이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한 사람 아담만이 선악과를 먹었어도 그 결과는 모든 이에게로 돌아가게 된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우리의 숙제가 된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의 결과 속에서 살아왔으며, 그 역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흘러왔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반드시 풀어내야 하는 큰 비밀이라 하겠다. 또한 이 해석에 따라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모든 문제의 근원까지 알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사건의 배경
생령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장)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마치 흙으로 지음 받은 무생물체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여 생명체가 되었다는 말처럼 들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생물체가 생명체가 되기 위한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지음 받은 일반적인 생명체에서 하나님과 같은 영적인 존재로서의 변화를 표현하는 부분인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생명체에게는 전혀 없는 그런 변화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 변화는 오직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처음부터 영적인 존재로의 변화를 감안하고 지어진 생명체였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뿐만이 아닌 더 큰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짐승들은 단지 짐승들일 뿐 결코 산영이 될 수 없었다. 또한 하나님이 다른 짐승들과는 분명한 선을 두시고 사람을 대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산영이 되었다는 표현이 짐승들과는 다른 영적 존재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이 산영이 되었다는 표현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면 그 끝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 시작에 대한 모든 비밀들을 풀어내야만 그 끝 또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시작은 사람을 중심으로 그려가고 있다. 마치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같이 여겨지며 이 사람에 대해 기록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일까? 이제 그것을 알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 생각을 하신 것일까? 성경은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신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단지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던 것일까? 생령이 되게 하신 것도 과연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그런 이유에서 이 모든 일들을 시작하신 것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조금 까다로울지라도 다른 이면을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본문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해보자.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내면으로부터 더 큰 목적을 감추고 계신 것이며 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엄청난 일의 시작을 단지 표현하기 시작한 것뿐이라면 어떠한가?
처음엔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겠지만 나중엔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하며 완전한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어떠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은 진정한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말씀하시는 것이며 그 중심의 계획은 더욱 크고 더욱 멀리 있었을 뿐인 것이다.
성령께서 알게 하시기로 우리가 아나니 우리로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배우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 사랑의 존재가 되어 서로를 사랑하는 자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장이다.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멘!
그분께서 처음에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였으니 그 지으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가 지으신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육체였으며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이 사람의 육체에 있음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여자와 선악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문제는 이곳 에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덴은 네 강의 발원지였으며 가장 풍요로운 장소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 에덴에 사람을 데려오셔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각종 짐승들을 만드시고 그가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에게로 데려왔다. 첫 번째 사람이었던 아담은 지혜로웠으므로 각종 짐승들의 특성을 따라 이름을 지어 주게 되었다. 각 짐승들의 골격을 알았고 그 피부의 특성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며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에게로 이끌어오사 이름을 어떻게 짓나 보시고자 하셨다. 아담은 여자의 뼈대와 그 피부를 보고 단번에 자기를 원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뼈대를 취하였고 또한 가장 부드러운 피부를 택하였음을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한다. 여자의 개입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돕는 배필이라 하였으니 무엇을 돕는 자인지 그것 또한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정녕 죽으리라 하신 뜻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성경은 전혀 다른 뜻으로 보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내가 너를 죽음의 벌로 다스리겠다 라는 뜻으로 이 부분을 해석한다면 어떻겠는가? 이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자를 죽음의 벌로 심판하시는 것과 같으며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자를 지옥의 형벌로 심판할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죽게 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염려하사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다만 표현해 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상태대로 성경을 해석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교회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아래 있는 자로서 성경을 해석했고 욕심에 미혹된 자도 그 마음에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해 나갔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2장)
선악과는 사람이 자기의 벗었음을 아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아담을 찾으실 때에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다. 그는 자기를 찾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대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않고서야 스스로 자기의 벗었음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말 그대로 선악을 알 수 있도록 사람의 지혜를 여는 실과였던 것이다. 사람이 어린아이에서 성장할 때에 언제 자기의 벗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될까? 그것은 자아의 인식을 할 수 있게 될 때일 것이다. 이처럼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아의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실체적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제일 처음 그가 인지할 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은 다만 벗은 자로서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옷만을 걸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요, 모든 생물들 위에 가장 뛰어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참되며 능력이 심히 많으나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커다란 갭(gap)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피하여 숨었다.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 있어 단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셨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게 될 것을 염려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악과를 취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왜 선악을 알게 되면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이 죽음이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행하는 자가 되지 못하고 무엇인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죄의 종은 죽음의 결과로서 사람에게 미친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는 살아있지만 죄의 종 노릇을 할 뿐 이미 자신의 존재 이유나 그 가치조차 잃어버려 다만 자아적 죽음에 이른 존재가 될 뿐인 것이다. 어떤 자가 죄와 싸워 선을 쌓는다 하자 그런다 할지라도 그가 행한 것이 진정한 선이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또 그것이 선일지라도 자신의 진정한 원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겠는가? 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잃어버린 자아적 사망에 이른 존재일 따름인 것이다.
뱀의 개입
뱀에 관한 의문은 성경에서부터 감추고 있는 부분이라 해석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이해의 편의를 위해 성령께서 내게 알리신 것을 토대로 여러 가지 가설들을 세워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 가설들이 사실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밝혀두는 바이다.) 뱀은 지금의 용(dragon)과 비할 수 있는 동물이다.
환상의 동물 용은 사람의 말을 할 수 있으며 날개가 있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고 그 입으로 불을 뿜으며 그 가죽은 이은 갑옷과 같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인 것이다. 어떤 때엔 이 용을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생명체로 표현하기도 했다. 옛 뱀은 용이요, 완벽에 가까운 생명체이다. 이 용이 왜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권유한 것일까?
뱀은 분명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그런다 할지라도 어떻게 선악과의 비밀을 알겠는가? 그는 분명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의 뜻대로 심부름을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뱀은 그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을만한 지혜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이것은 분명 누군가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분명해 지는 것은 천사들 중 누군가가 뱀을 통해 이 일을 사주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뱀은 순순히 그 말을 따랐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뱀이 매우 간교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뱀이 원하는 무언가를 천사 중 누군가가 약속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뱀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외면하시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마침 같은 생각을 하는 천사 중 하나가 이런 생각을 하는 뱀을 보고 그에게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준다.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선악과를 먹도록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가장 뛰어난 뱀이 지상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뱀은 이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뱀은 이것을 안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뱀은 자기의 간교함을 드러낼 때가 이 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담을 지켜보았고 또 여자를 지켜보았다.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뱀은 간교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뱀은 남자보다 여자를 미혹하는게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여자는 남자에게 속했고 남자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었다. 또 여자를 설득하기만 하면 남자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뱀은 여자가 혼자 있을 때에 그에게 은밀히 말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여자는 뱀의 의도를 모른 채 자신 있는 말로 대답한다. 아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담이 그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보지도 만지지도 말라 했던 것이다. 왜일까? 여자는 높아진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 채 뱀이 의도한 대로 끌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뱀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는 그 말을 듣고 선악과가 있는 동산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자는 선악과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 나무가 너무나 보암직했으며 또 먹음직했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뱀의 의도대로 이끌려 손을 내밀어 그 실과를 따서 자기도 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한다. 뱀은 이로써 완벽한 승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지혜가 완벽하여 이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육체의 욕심에 이끌려 선악과를 따먹고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평생 자기 안에 있는 간교함을 버리기 위해 이러한 욕심과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 주고 있다.
곧 아담의 첫째 아들이 욕심에 이끌려 자기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이는 첫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르시기를 “네 안에 죄의 소원이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고 경계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죄가 원하는 것들을 자기 안에 두고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선악과의 결과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혹 선악과를 사람이 먹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도 똑같은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단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하나님을 버리게 될 것인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것도 해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한번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저주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장 중에서…)
뱀은 생각과는 달리 저주를 받아 가장 미천한 짐승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뱀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뱀의 옛 모습인 용의 모습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항상 살아있는 다른 어떤 생물보다도 더 많이 거론된다. 왜일까? 영적인 세계에서 영혼 없는 뱀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용을 만들어 이 용을 우상시 해오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그 용이 자신의 상징으로서 이 세계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덴이라는 세계에 간교한 짐승이 웬 말인가?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간교하게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닌 것이다.
이 부분은 설명하는 것조차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해해주기를 기대하며 설명해 보기로 한다. 이 세계는 어떠한 하나님의 원칙들에 의해 창조함을 받았는데 그 원칙들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성되어 있고 다른 모든 것들은 대부분 개방되어 있다 할 수 있다. 천사의 타락도, 또한 뱀의 간교함도, 그리고 인간의 타락 또한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개방된 세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던 하나의 목적은 반드시 가능하도록 열려있다.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지으실 때에 매우 복잡한 형태로 지으셨던 것이다. 실제로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셈이니 그 복잡함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여자의 개입 또한 타락의 통로가 되기도 했지만 구원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욕심에 이끌려 사단의 종이 되기도 쉬운 존재가 여자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 중에 더욱 여자가 많을 것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영적인 존재로 새롭게 나지 않으면 모두 사단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면 누가 더 쉬울 것인가? 그것은 남자이다. 하지만 더 많은 여자들이 실수 속에서 시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또 뱀의 머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뱀은 간교한 짐승이란 이름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는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을 영향 받지 않으시기에 우리 식의 시간 개념을 따르지 않고 말씀하시는 경향이 종종 나온다. 이 경우 또한 모세에게 가르치실 때에 뱀을 처음부터 간교한 짐승으로 소개하신 이유가 그러한 것이다.)
사단이 뱀을 선택했기 때문에 뱀은 사단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다. 아니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단을 상징화하여 지은 존재가 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별 차이는 없다. 뱀의 머리라 했으니 사단이다. 뱀의 주관자 혹은 뱀의 실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니 곧 사단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하다. 여자의 후손이라 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너무나 먼 시간에 있을 일들을 마치 조금 후에라도 당장 일어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년을 사는 존재라면 일이 백년은 그리 긴 시간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니 수천 년을 멀지 않게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획은 이미 처음부터 예비된 것이었다.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염려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또 죄로 인해 이 세계는 황폐케 될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태어나게 될 것이고 또 그것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아멘!
논제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일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왜 동산 중앙에 있게 된 것일까? 그 나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무였을까? 주께서 만드셨다면 왜일까? 이것은 매우 까다로운 질문이며 또 알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피해가야만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가 필히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과연 우리는 알 필요가 있을까?
주께서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 알 필요를 주시는지 생각해 보자. 적어도 난 이 부분에 대한 궁금함을 갖고 있으며 이 부분이 성경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리라 확신한다. 또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과 그의 사랑하심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해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주시기를 구한다.
논제2. 선악과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선악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 눈이 밝아져 자기의 벗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선악과를 먹을 때에 사람의 몸과 정신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하와의 경우와 아담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겠다.
먼저 하와의 경우이다. 뱀의 미혹에 마음을 빼앗긴 하와는 동산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와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를 보게 된다.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 것이다. 하와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선악과를 따먹었고 자기 남편에게도 갖다 주게 된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짐을 느꼈다. 지혜롭게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때문에 하와는 사단의 말이 과연 옳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속히 자기 남편에게 나아가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참혹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젠 아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와는 갑자기 열매 하나를 가지고 와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아담은 하와가 가지고 온 열매를 보고 선악과인지 알 수 있었다. (만일 아담이 하와가 준 실과가 선악과임을 모르고 먹었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변명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당신이 내게 준 여자가 한 나무의 실과를 내게 주었는데, 내가 그것을 먹은 후에 나의 벗었음을 알게 되었나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물으신 물음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게 하였느냐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와의 권함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가 뿌리치지 못한 것이 하와를 사랑했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도 역시 먹고 난 후에 눈이 밝아졌고 선악을 알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문제는 드러나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으나 하나님처럼 거룩하지도 의롭지도 않았다. 또 하나님처럼 능력이 많지도 또 완전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참혹한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이 제일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벗은 모습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열매라 할 수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신비로운 나무의 열매였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그릇되게 한 이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선악과는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써 선악과를 설명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선악과를 사과라고 말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했으며, 단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의 벌로 사망이라는 엄청난 결과가 도래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일 뿐이다. 사망이라는 결과는 하나님이 내린 저주가 아니요,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 죄의 결과로 찾아오는 것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악과를 금하신 이유도 스스로 죄에게 팔려 사망에게 먹힐까 염려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면 생명나무 또한 더더욱 신비로운 힘을 가진 나무가 된다. 이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영생한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아주 놀라운 나무이다. 영생하게 하는 열매가 있었다는 것과 그 나무가 이 땅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보면 에덴이라는 곳이 얼마나 비옥하고 완벽한 곳이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에덴의 중심이라는 곳이 말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게 된다. 선악과를 먹은 벌로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실과마저도 따먹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염려하셨던 것일까?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사람이 살기 위하여 생명나무 실과를 먹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이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두루 도는 화염 검까지 두시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지키셨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금하신 생명나무 실과를 이제는 허락하시고 이기는 이에게 주어 먹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성경에 있다. 과연 누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될 것인가? 그것은 에베소교회이다.
일곱 교회의 첫 번째인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처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받은 교회이다. 수많은 시련과 문제들을 인내로 승리하게 된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처음 사랑을 다시금 회복한 자에게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처음 사랑이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인하여 얻게 된 사랑이요, 그에게 배운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의 근원일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주어 먹게 하시겠다는 것은 생명나무는 이런 자들에게는 좋은 것이나 아담과 같은 상태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의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는 해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해로운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영원한 존재로서 불행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의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그에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이라는 새로운 길을 여신 것은 또 다른 생명의 길이 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금하신 생명나무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여신 것이요, 죽음이란 생명에로의 또 다른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도 참여할 것이며 영생이라는 엄청난 결과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아멘!
논제3. 사단의 존재는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가?
사단은 왜 인간을 미워할까? 사단은 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일까? 과연 사단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또한 이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단은 천사였다.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처럼 천사장이요, 그 중에서도 더욱 높여진 존재였던 것 같다. 미가엘은 군대를 주관하였고 가브리엘은 사역을 관할하였다. 사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고 특히 찬양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을 천사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천사들을 만드신 이유조차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천사들은 많은 일들을 하기에 편하게 창조함을 받았다.인간들에 비하면 월등히 아름다웠고 의롭고 완전한 모습이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 하나를 창조하실 때에 천사들도 함께 있어서 이를 감탄하며 기뻐했었다.
그러나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천사 중 하나와 같이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매우 흡족해 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이해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한낱 흙에 불과한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자유롭게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써 창조함을 받았다. 마치 천사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악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그들에게 품은 마음을 돌이키시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들짐승 중에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뱀을 충동시켜 선악과를 따먹게 시킨다. 그리고 뱀은 하와를 미혹하고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실망하셨으나 돌이키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욱 그들에게 집착하심을 보이셨다.
이것은 주께서 내게 알게 하신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정리해 본 것이다. 어느 정도 추론한 것들이 있으나 나의 이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적었다. 4권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단은 모든 역사 속에서 철저히 간교함을 숨기면서 일해 왔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간교함과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이 시대의 목회자들도 자신의 간교함과 교만함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 받는 형벌에 함께 처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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