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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성경해석1 | 2.성경해석 두번째 - 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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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5,088회 14-06-29 15:03

본문

 2. 성경해석 두번째 - 게바




논제의 이유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 복음1장 중에서…)

 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의 일이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 속엔 무언가 숨겨진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에 이미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알고 계셨던 것 같아 보인다.
 예수께서 보신 베드로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하신 이 말씀은 과연 어떤 뜻을 품고 있는 것이었을까?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베드로를 알고자 하여 베드로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모았고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나는 매우 두렵고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에 관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반석이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웠고,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교회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하게 될 교회를 미리 아신 하나님이 그들을 부정하시기 위해 베드로라는 한 사람을 어떻게 세우셨는가에 관한 일이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운 것이라야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교회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은 반드시 해석 되어야 하는 부분인 것이다.

사건의 배경

첫 번째 만남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1장 중에서…)

 베드로는 안드레의 형이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베드로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탓인지 그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갈릴리 시골마을의 한 어부일 뿐이다.

 하루는 안드레가 와서 흥분된 목소리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한다. 하지만 베드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드레가 진지하게 메시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예수께로 나아가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갈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신다. 베드로는 그 뜻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알지 못할 위압감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 자기의 생업을 계속 해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만남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누가 복음 5장 중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오는 모습을 베드로는 보았다. 그는 밤새 고기를 잡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고 배에서 내려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보았고 또 그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무리들을 보았다. 그 무리들을 보고 베드로는 저 분이 진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고,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베드로는 많은 무리들을 마주 대하여 볼 수 있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왜 그토록 많은 무리가 예수께 나아와 주의 말씀을 들으려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에 답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여 자기의 마음이 주께 있음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물에 잡힌 고기들로 두 배를 가득하게 채우게 됨을 보게 되었을 때에 베드로는 비로소 그가 진정한 메시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에서야 베드로는 주 앞에 있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자신의 모습이 한낱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베드로는 마음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꼈고, 이로 인하여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리게 되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조차 없었고 자신의 모습이 한낱 죄인일 뿐이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된 것이다.

부르심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태 복음 4장 중에서…)

boat

 드로는 큰 슬픔을 느낀 후에도 자기의 생업을 위하여 계속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베드로는 달라진 모습을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고, 새로운 삶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한 후로 그는 커다란 짐을 덜어버린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좇아 그를 위해 자기의 인생을 모두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에겐 그런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그에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치 이를 모두 아시는 것처럼 그에게 나아와 그를 부르시고 당신을 좇을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베드로에 대한 주의 부르심은 어떻게 본다면 아주 평이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베드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어떠한 부분에서든 매우 특이할 정도로 부각되었으며, 또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왜 그토록 성경이 베드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록자들이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들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생각 자체가 더욱 이상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베드로에 대한 부르심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럴지라도 베드로를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소개시켜 주고 있다. 게바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오직 주의 부르심을 따라 제자가 된 것도 성경은 결코 흐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또 지속적으로 베드로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다루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성경 안에서 그 걸음을 따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태 복음16장 중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좇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배울 수 있었다. 주의 가르침은 어떤 때엔 매우 어려워서 깨달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풀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셨다. 또한 베드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그릇된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또한 주께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를 보았고 또한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것 또한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물위를 걷다가 의심하여 빠져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말을 했던 자가 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였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더욱 그리했다.

 처음엔 분명 어린 믿음이었지만 그 믿음은 조금씩 성장해 나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귀신을 제어할 권세와 치료의 능력을 주사 12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에 대한 모든 생각이 굳게 되었다.

 그럴 즈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또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에 베드로가 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이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는 베드로를 처음 만나실 때에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심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베드로가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줄을 미리 아셨음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부터 반석으로 세우시기를 계획하셨고 베드로는 이 일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약은 이 교회에게만 있고 다른 교회에겐 없는 것이다. 또한 다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천국의 문은 굳게 닫혀있을 것이다.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예언을 행하며 선지자 노릇 할 것을 주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릇된 교회일 뿐이다. 그릇된 교회일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전이라고 사람들은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께서는 이런 그들의 생각에 동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교회를 이룰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를 증거 하시기 위해 베드로라는 한 사람을 세워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천국열쇠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부인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중에서…)

 베드로는 충분한 훈련을 마쳤으며 그 결과 믿음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믿음은 분명했다.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 그의 고백은 진실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가 자기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것이 분명함을 말씀하시기 위해 또한 기억나게 하시기 위해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닭이 두 번 울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겠다고 한 말이 기억났지만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서 주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성 밖으로 뛰어나가서 통곡하고 울었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의 생각처럼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부족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그를 만나시고 물으시기를 네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고 또 그리 물으시고 양을 치라 그리고 다시 그리 물으시고 양을 먹이라 말씀하신다.

sheep

 베드로는 반석으로서의 본이 되는 존재로서 주를 우리에게 나타낸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였으니 어린 믿음을 가진 자들을 양육하라는 뜻일 것이다. 둘째 내 양을 치라 하였으니 믿음을 가진 자들로 온전함에 이르도록 책망하고 가르치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다시 내 양을 먹이라 하였으니 장성한 자가 되기까지 양육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한 후에 주께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으니 오히려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 터가 되는 자들이 이와 같이 순교하는 자가 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을 제시하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주께서 한 사람 이 베드로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말이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 이 베드로라는 사람을 부각시켰고 또 주께서 베드로를 통해 무언가를 하시려고 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이 시대 대부분의 교회가 더 이상의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게 두려워 하나님과 다투는 자가 되고 그의 말씀을 변하려 하겠는가? 그러할지라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없을 것이고 온 세상에 증거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들에 의해 다시금 믿음은 온전함 가운데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아멘!

논제1. 베드로는 반석으로 예비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반석이라는 의미는 터를 말하는 것이다. 산상 보훈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모래 위에 집을 짓지는 않으셨다. 오직 반석 위에 집을 짓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기에 적합한 터가 되었다.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데 그 터는 어떠한 기준에서 좋은 것이 되거나 나쁜 것이 되는 것일까? 어쨌든 베드로는 그런 좋은 터 곧 반석처럼 단단한 터가 되는 본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터가 더욱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되어야만 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셨던 교회의 터는 바로 베드로가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어떤 면을 반석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일까?

 우리는 주께서 베드로를 통해 반석과 같은 터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베드로는 반석이었다. 곧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기에 적합한 터가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베드로의 고백이 그 터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을 보고 그 전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이런 일들을 흔히 어리석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과연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기까지의 그의 삶은 예수님의 훈련 속에서 서서히 자라가고 있었으며 그 성장은 그 고백을 낳기에 앞서 커다란 확신과 믿음을 우선적으로 갖도록 했었다. 베드로가 갖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구원자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더욱 중요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는 배웠고 또한 그는 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도 그는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기의 양들을 맡기실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세 번이나 물으신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랑을 이제 그 맡겨진 양들에게 베풀라는 뜻인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에 비로소 그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반석으로 세우신 것과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교회의 터가 되는 반석으로의 모습은 단순히 그의 고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석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그의 삶이요, 특히 예수께서 베드로를 통해 보이시고자 했던 베드로의 모습인 것이다. 곧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부르심을 얻은 것, 그리고 예수를 좇는 가운데 들었던 많은 말씀 속에서의 그의 성장과 믿음의 확신 그리고 그에게 부족했던 성령의 충만함, 그는 주를 사랑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반석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이 반석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며 또한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완전히 성장한 모습이 아닌 가장 기본적인 그의 시작점 정도까지는 말이다.

논제2. 약속 없는 교회와 거짓 선지자들

 베드로에 의해 교회는 그 중심부터 재검토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거하는 교회가 어떠한 것임을 또한 알아가야 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 복음 7장 중에서…)

 산상 보훈의 결말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향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히신다. 이들이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지는 다시금 해석함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누구인지에 앞서 어떤 사람들인지를 먼저 밝혀내고자 한다.

 산상 보훈의 결말 부분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먼저 이야기 하도록 하자. 결말의 시작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로 시작하신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하심에 있어 먼저 마음에 많은 것들을 가지셨다. 그것을 표현하기 시작하심이 산상 보훈의 시작이었고 이제 그 결말도 그 마음 가운데에 있는 어떤 또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보시는 세계 속엔 매우 적은 무리만이 생명의 길을 찾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생명의 길 곧 복음에 의한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은 그 길 자체가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그 이름을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을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도록 권유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결국 그들의 목적은 노략질일 뿐인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는 방법으로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은 결코 열매 맺을 수 없는 나쁜 나무이기 때문인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를 향하여 주여! 주여! 하지만 결코 그 주인의 뜻을 알려 하지도 않으며 또한 행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조차 자기를 선지자로 나타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주장하며 나아온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처럼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기도 한다. 또 권능을 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여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있으리요!”한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이다.

 예수께서 보시는 세계에선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이미 있던 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불법을 행한 자들 곧 이 거짓 선지자들도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또한 많은 이들 앞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처럼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결론에 이른다. 곧 산상 보훈의 처음부터 말씀하신 내용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여 그 뜻대로 사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이 많은 환란과 시험 중에도 견디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죄 사함을 얻어 영생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 믿음을 어떤 터 위에 세워 나가야 한다. 그 터는 산상 보훈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어야 튼튼한 반석과 같은 터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스스로가 터득하여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못해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맡기셨고 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교회의 터를 닦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사람들을 모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내어 쫓았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들을 내어 쫓았고 자기의 교회를 항상 자기에게만 있도록 주장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같은 자가 아니면 그 터가 되지 못하게 하셨고 심지어 보냄을 받지 않고서는 나아가지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 터가 되는 자는 자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택함이요, 부르심에 의해 훈련되고 연단되어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 보냄을 받은 자이어야만 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보냄을 받지 않았어도 나아갔으며 또한 주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이르렀던 자들이 된다.

 이들의 불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들에게 쌓여 하늘에 사무치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이 불법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에게 내리실 재앙이 크고 두려운 것이 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사단이 받는 형벌과 함께 처한다 하심을 보면 이 재앙이 어떠함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망할 것이며, 그 인도자 된 거짓 선지자들은 사단과 함께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터를 베드로와 같은 참된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세운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따를 것이며 모든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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