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권 성경해석3 | 1.성경해석 다섯번째 -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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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585회 14-06-29 15:07본문
1. 성경해석 다섯번째 - 예배
논제의 이유
예배란 무엇인가? 또한 예배를 드림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많은 시간 속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이 예배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행해왔다. 어떤 것이 진정한 예배인지 알지 못했어도 그냥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대로 우리는 예배라는 것을 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만일 이에 대한 답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제 그 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절실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하는 자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예배에 대한 성경의 해석은 매우 절실하다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지금의 이 시대 속에서 행해지는 예배는 사기극에 불과한 헛된 꿈일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예배는 아무런 것도 아닌 단지 사기극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손에 피가 가득한 채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예물을 드리고 그 이름을 부르면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무지한 자들이 무지한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을 주께서도 즐거워하시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것인가? 주께서 무지한 자의 무지함을 기뻐하시겠는가? 악인의 악행을 즐거워하시겠는가? 과연 주께서 그들의 입술의 열매를 즐기시며 그들의 찬송과 예배라는 것을 기뻐 받으시겠는가?
진실로 자기의 중심의 마음을 아는 자가 드물며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마음을 두는 자 또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기의 마음을 보아야 하며 그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얻어야만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안에 나타나게 될 때가 이르게 될 것이며 또한 그 앞에 자기를 내어놓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으로 예배하게 될 때가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예배는 믿음으로써 행해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며 우리의 중심의 노래는 그를 향한 찬송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는 반드시 해석 되어야 할 성경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진정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것이라 믿는다. 아멘!
사건의 배경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4장 중에서…)
아버지께서 찾으신다. 예배하는 자들을……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배란 어떤 것인가? 아버지께서 찾아 얻기를 원하시는 예배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내게 있어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배하는 자가 찾아 얻기를 원하는 것은 오히려 이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 나는 그것을 찾았고 또한 지금도 그것을 찾아 얻기를 원한다.
예배에 대한 원함은 어디로부터 일까? 한낱 사마리아 여자의 질문이 왜 예배에 관한 것이 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예수께서는 이 여자에게 나아가셨던 것일까?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 여자의 의문을 풀어주셨고 또한 자신이 이 여자가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밝히 이르신다. 이 여자는 누구인가? 다섯 남편이 있었던 이 여자는 다만 방황하던 여자였을까? 분명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전부터 아셨던 것으로 보이며 이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에 주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느니라 하신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다.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난해하지만 충분히 알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며 어떤 답을 풀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어 줄 것이다.
예배에 대한 이 여자의 질문은 분명 그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어떻게 예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까? 또한 무엇 때문에 이 예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은 예배라는 커다란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사마리아 여자의 이야기를 우선 풀어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야곱의 후손인 사마리아 여자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열왕기상 11장 중에서…)
솔로몬은 지혜로움의 상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지혜로 말미암아 수많은 여자의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고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댓가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의 신을 믿을 수 있으며 그 신들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잠언이나 전도서를 통해 그의 많은 생각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는 것이 지극히 드문 자였다. 모든 것을 아는 자와 같았지만 반대로 하나님에 관한 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불안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혜로 말미암아 인생에게 있는 일의 결국을 보아왔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존영도 주리니 너의 전의 왕들이 이 같음이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이 같음이 없으리라.” (역대하 1장 중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그로 인해 엄청난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을 얻었으며 부와 재물과 존영도 얻게 된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슬퍼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속자가 필요함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슬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매우 슬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스스로의 의지를 먼저 열어주지는 않으신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게 하지 않으시며 죄나 의에 관해서도 먼저 제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밀들을 충분히 알만한 것을 그들에게 베푸셨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하셨던 것은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었기에 이 일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에겐 어떠했을까? 다윗이 생각했던 것들을 생각했을까? 또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성전에 거할 생각도 없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솔로몬에게 짓게 하셨다. 왜일까? 그것은 분명 무언가 중대한 일을 이 일로 인하여 알게 하시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성전이라 하셨고 그 성전을 헐라 말씀하신다.
주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이들이 교회요, 하나님의 거할 처소가 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런 사실에 눈뜨고 있었던가? 다윗이 만일 이 일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는 오실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을 것이며 또 하나의 비밀을 간직하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전혀 이 일에 관하여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많은 지식과 지혜로 인하여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더욱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구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었다. 단지 백성을 재판하기 위한 지혜와 지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은 모든 인생의 길과 모든 만물의 길을 알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훌륭한 철학자이기도 하였고 또한 천재적인 과학자이기도 하였을 것이며, 가장 뛰어난 치리자이며 모략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모든 지식과 지혜는 수많은 여자들을 불러 들이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그들의 종교들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주 앞에서 크게 미움 받는 일이었으며 또한 경계를 받게 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젊었을 때엔 그의 순전을 지키다가 나이 늙어서는 주의 경계를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열왕기상 11장 중에서…)
그가 나이 늙어 왜 그 언약을 깨뜨리게 된 것일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평생을 지켜온 언약을 깰 때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 중대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솔로몬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윗이 하나님을 알 때엔 그 마음에 큰 사랑과 신뢰가 있었다. 또 나이 들어가면서도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믿음의 사람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솔로몬에겐 이러한 일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또한 그가 남긴 글들 속에서도 그러하다. 이로 보건대 솔로몬은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그의 언약을 법으로써 인식하고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솔로몬은 여호와를 인정하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종교를 따르겠다는 일념을 깨뜨리기엔 많은 부분에서 그의 지식과 지혜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자기의 신을 믿으며 섬길 수 있다. 그 결과가 황폐함이라도…… 그 어리석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호의가 되리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사마리아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라는 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솔로몬의 이야기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리아의 탄생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열왕기상 11장 중에서…)
솔로몬은 자기의 나라를 자기의 신복에게 빼앗기게 될 것을 알았고 그 신복이 여로보암이 될 것 또한 알았다. 때문에 그를 찾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신고로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피하였고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거하게 된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여로보암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들을 얻게 된다.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했다. 그 후에 그는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한다. 이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은 매우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열왕기상 12장 중에서…)
두려움이 낳은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날까 두려워서 행한 이 일은 무엇이었던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하는 것이었으며, 아론의 자손이 아닌 자들이 돈을 내고 제사장이 되었으며, 레위 자손이 아닌 자들이 주를 섬기는 일을 하며 그 백성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단지 두려워한 것만으로 끝나기엔 너무나 커다란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남쪽 유다는 눈에 뻔히 보이는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릇 북쪽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백성들은 알지 못한 채 그 거짓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믿음을 키워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자기들을 이끄는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일지라도 그들은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어 버리고 만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이런 사실을 뻔히 보고 있었기에 감히 주장할 수 있었다. 오직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전이요, 그 섬기는 레위인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종들이며 오직 아론의 자손만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말이다. 유다의 백성들은 사마리아를 멸시했고 사마리아는 이런 유다를 또한 미워했다. 이 둘 사이엔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멸망 당하기까지 그들은 서로를 미워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장 중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이르셨을 때엔 이미 그곳은 장사하는 자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마리아가 아닌 예루살렘이 더욱 더 패괴하고 더욱 더 더러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20장 중에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말인가? 이들이 과연 하나님의 종들이 맞는가? 이들이 사마리아를 비웃으며 거짓된 신앙을 가르친다고 했던 자들이란 말인가? 진정한 레위인들로 구성된 이들이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진실을 모두 잃어버렸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는 다만 예루살렘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실 뿐인 것이다. 혈통으로 이어진 레위인이나 또한 혈통으로 이어진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믿음을 기대하셨던 것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기를 기대하셨고 모세와 아론의 믿음을 잇기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주님의 기대를 저버린 채 오만과 어리석음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했으며 그 결국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까지 이르게 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장 중에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그들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온 것은 빼앗고 노략질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하지만 겉으론 양의 옷을 입고 있어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의 열매를 보아야만 한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장 중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열매가 이러하다고 또한 가르치신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의 뜻은 행하지 않는다. 아마도 주인의 원하시는 뜻 자체도 모르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 그들은 선지자 노릇한다고 한다. 아마도 선지자인 양 예언을 하거나 사람의 감춰진 마음을 아는 양 지껄인다는 것이다.
또한 귀신을 쫓아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귀신이 그러는 척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하는데 병을 고치거나 신비한 이상을 보게 하거나 넘어뜨리거나 영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여러 가지 일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은 귀신이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할 수 있기만 하다면 아마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이다. 이들의 이런 열매는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없는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들은 이런 일들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된 표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만 이들이 하나님께 듣게 될 말은 단 한 가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불법을 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불법이라 함은 사마리아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여호와라 칭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아론의 자손이 아닌 자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행한 모든 것은 불법이다. 불법을 행하는 모든 자들을 부정하시기 위해서 주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이 반석이라는 기반 위에만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보면서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손짓하며 어리석다 하지만 결국 열매 없는 이 시대의 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교회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될 뿐인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은 단지 혼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사마리아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엔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이유라는 것을 용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여인의 마을은 다른 마을과는 상당히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가지로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면만을 보더라도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숨겨진 주의 백성들과 같은 자들이었다. 예루살렘이 아닌 작은 촌 마을에 그것도 사마리아에 이처럼 믿음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여인은 이런 마을의 좋은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고 마을의 어떤 자보다 지혜롭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였다. 그는 아름답고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자기의 믿음대로 살고자 했다. 뭇 사람들은 이런 뛰어난 여자를 발견한 것을 행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마을을 벗어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리아 인은 결코 예루살렘에 다가 갈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녀는 큰 상심을 했고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그는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다. 남자가 죽었거나 그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았을 경우도 있다.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고 지혜로웠기에 얼마든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녀는 다섯 번째를 마지막으로 다시금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혼자 거하면서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해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이 마을에도 그녀와 결혼하기 원하는 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는 공허함과 싸워야만 했고 또 끊임없는 기다림에 인생을 걸어야만 했다. 어느 날 우물을 길러 갔는데 유대사람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자기에게 관심 있어 말을 하는 줄 알고 그녀는 유대인이면서 왜 자기에게 말을 거냐고 비꼬듯 대답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매우 친근한 목소리로 자기가 누군지 알았더면 오히려 그녀가 구했을 거라고 한다. 또한 만일 구했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녀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물을 얻겠냐고 대답한다. 또한 이 우물은 야곱이 준 것이라 하며 야곱보다 더 큰 자가 되어서 새로운 우물이라도 만들어 주실 거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답하는 말은 야곱이 준 우물의 물은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그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되어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자는 매우 믿기 어려웠지만 상대가 거짓되어 보이지 않았기에 지혜롭게 답변했다.
그 물을 내게도 주옵소서. 그 때 그 사람의 대답은 놀랍게도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다. 여자는 남편이 없었다. 때문에 그냥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섯 남편이 있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자는 이 사람은 선지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장 난해한 평생의 질문을 그에게 던지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람에게서 매우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다. 너무나 설득력 있고 시원한 답변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을 듣는 것은 메시야에게서 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최종 결론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이 사람의 말을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말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리니 그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의 대답이었다. 내가 바로 그로라. 그 분은 곧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마을로 뛰어가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말을 한다. 와서 보라! 이 사람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들이 와서 보고 처음에는 이 여자의 말을 듣고 믿더니 이틀을 함께 유하면서 주의 말씀을 많이 듣고 그 가르침을 받더니 그들이 한가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스스로가 확신하게 된다.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장 중에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먼저 이 의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거짓된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신다. 또한 거짓된 예배에 속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짓된 예배에 관해 알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교회의 예배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이전 시대의 교회들도 그러했으며 또한 가인의 예배 또한 그러했기 때문인 것이다.
가인은 땀 흘려 일하는 자신의 처지를 용납하지 못하는 자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하나님 앞에서 농사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어미 하와는 그 첫 아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셨기에 이 가인이 과연 원수를 갚아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그 아들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이런 하와의 기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의 이야기도 믿을 수 없었다. 세상의 왕이요,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존재라니 이것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 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둘째가 되는 아벨에게는 이는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아벨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것을 보면 왠지 더욱 화가 날 것 같았다.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며 이제 얼마 안 있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아벨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대며 자기는 양의 새끼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우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벨은 그렇게 하겠다고 자기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런 후 날이 이르러 가인은 곡식 단을 세우고 그곳에 불을 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날에 또 한 차례 기분 나쁜 일이 생기게 되었다. 양의 새끼로 제사를 드리겠다던 아벨이 뛰어와서는 자기 양의 제물에 하나님의 불이 내려졌다며 자기의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거라며 떠드는 것이었다. 가인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매우 분한 마음이 들었고 얼굴이 확 달아올라 붉어졌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창세기 4장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죄의 원하는 것들이 가인의 마음에 있으니 그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아벨과 같은 자가 드려야 한다. 가인 같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히브리 기자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셨기에 그는 죽었어도 그의 믿음은 이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인 것이다. 아벨은 더 나은 예배를 드렸기에 하나님의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린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의 예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예배는 그 삶을 기반으로 하는 예배이다. 가인처럼 의롭지 못한 삶을 사는 자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결코 거짓을 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 거짓에 흔들리는 분도 아니시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인간은 누구나 죄의 소원을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그 죄를 다스려야만 한다. 진정한 예배는 그 죄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의로운 자라는 이름을 받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요구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믿음의 삶을 사는 총체적인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아벨이 자신을 대신해 죄 없는 어린양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결국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양을 양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로 여기셔서 그의 예배를 받으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행하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또한 아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입은 자들이 되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하는 자
예배하는 일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교회를 나온 후에도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때문에 이 일로 인하여 주님께 여러 차례 묻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이에 대한 아무런 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주일은 왠지 무언가 빠진 삶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냥 이대로 가도 좋은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그릇된 예배를 드리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미움거리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난 미움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 어디냐고 생각하며 또한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감에 따라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면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언젠가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가 오면 그때에 내가 주께 예배하리라고 생각했다.
자기의 믿음의 삶을 준비한 자들이 중심의 노래를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서서 기도하며 또 찬송하며 경배하는 날이 이르기를 바란 것이다. 나의 평생에 단 한번도 예배하는 때가 이르지 않을지라도 내가 주 앞에서 나의 삶을 예비할 것이며 또 그를 노래할 것이며 또한 기뻐할 것이다. 다만 그분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내가 하지 않기를 조심하며 또 주 앞에서 항상 있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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