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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예수의 이름으로 | 2. 주께로 나아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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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091회 14-06-23 21:59

본문

 2. 주께로 나아가는 자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을 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 행복에 관하여 말하자면 마치 부도를 낸 어떤 사람이 그 모든 빚을 탕감 받았을 때 느끼는 기쁨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은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이 더욱 즐겁게 한다.
 그러나 이 생명의 길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더 좋은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말이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예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기에 예수의 이름이 붙으며 성령께서도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그에게 오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인의 영으로서 의인에게 오신다는 것이다.

자아의 존재

 예수님과 함께 한 몸에서 산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주도권을 완전히 양도한 상태이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아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척하는 것은 정말 최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매우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자아의 존재 자체 마저 부인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을 받아 드리기에 조금 편한 상태에 있을 때 그를 만났다.

 사실 나는 바보요, 멍청이였다. 그리고 왠지 난 예수님을 하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쉬웠다. 처음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과연 그러할까? 나는 생각했지만 존재의 이유로 그것을 내세우는 것은 어쩐지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어떤 면에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론을 그냥 받아들이는 모습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혀 다른 반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한의 영역 속에서의 유한의 의미는 제로’일 뿐이라는 수학적 결론 때문인지 모르지만 ‘영원한 존재 앞에서의 인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지워 버릴 수 없는 문제로 내게 자리잡아 갔다. 그래서 성경을 보았다.

 과연 성경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영원한 존재이신 예수님과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어내시고 그 갈비뼈를 기초로 해서 여자를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니 하나라 칭하리라.” 말씀하신다. 또 바울의 증거함에도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하였다.

 이로 보건대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영적인 존재로 다시금 창조되기 위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나셔서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 하셨다.

 이제 이 예수를 인하여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며 그의 이름 안에서 진정한 새 피조물이 되어 가기 위해 또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만약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나지 못한다면 존재 자체의 의미는 없는 것이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진리이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어떻든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나의 영이 그로 말미암아 다시 살기를 간절히 바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나의 애틋한 사랑의 단꿈도 포기해야 했고 부자가 되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었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버렸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값지고 좋은 것을 얻을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재앙을 피할 절호의 기회까지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나보다는 예수가 더욱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죄 사함의 결국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리고 죄 사함의 증거는 성령의 인도함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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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하면 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천국과 같은 곳에 머물게 되어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가짜 천국을 진짜라고 믿게 되기도 하며 자기의 사랑하는 이들을 그 가짜에게로 인도하기를 기뻐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으며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됨과 같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죄 사함과 성령의 인도를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아야 한다.

포기의 무게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14장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했다. 허다한 무리를 향한 그분의 말씀은 먼저 그들이 포기의 무게를 느끼길 원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를 좇는 것에 대한 포기의 무게를 허다한 무리가 느끼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그 무게를 백지장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를 단지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든지 교회를 잘 다니기만 하면 된다든지 하여 그 무게를 매우 가볍게 만들어 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또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다툼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쳐있는 인생에게 안식과 평안이 되리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를 좇으려면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제 이 포기의 무게를 우리는 느껴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께서 왜 그리 말씀하셨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존재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체를 따라 우리가 세상에 한번 태어났던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삶을 죄 아래의 삶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이나 우리 편에서는 우리의 삶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거지와 왕자가 뒤바뀐 것과 같다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거지의 삶을 잃어버리지만 새로운 왕자의 삶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포기의 무게는 하나님 편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며, 사람 편에서는 그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결과로 마땅히 우리가 담당해야 할 몫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허다한 무리를 보시고 이처럼 예수를 좇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게 하신 것일까?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누가 복음 14장 중에서…)

 이 말씀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좇으라는 말씀에 이어 하신 결론적인 충고이다. 우리가 포기의 무게를 가져야만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이 그를 좇을 지라도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는 존재의 변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다만 예수의 이름을 부를 뿐이며 세상의 소금이 될지라도 결코 맛을 낼 수 없는 소금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맛을 잃은 소금은 이미 귀도 먹었고 눈도 멀었기 때문에 그 음성 또한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닌 진정한 맛을 내는 소금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귀머거리 소경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포기의 무게에 눌려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리라고 말하고 계시지 않는가.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 포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영혼구원이라는 명분 아래 가족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돈도 더욱 많이 소유해야만 영혼 구원을 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우월한 직업을 가진 자가 됨으로 많은 죄 아래 있는 자들의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주의 뜻이고 주의 방법이란 말인가? 주는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는 주께서 소수를 선호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주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다만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신다는 뜻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4장 중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또한 과거의 육체를 따라 난 삶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위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려 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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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예수 이름으로 사는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십자가가 각각 있는 것이다. 또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도 있으며 직분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이는 우리가 그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며 그 사랑을 인하여 그를 위해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진주 장사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 복음 13장 중에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본 자라면 이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자이나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이라고 한다. 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으면 그는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열매 맺지 못하는 행함이 없는 신자들 또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비유의 시작은 그 앞에서 부터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장 중에서…)

 예수께서 바닷가에 앉으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셨고 온 무리는 해변가에 섰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유만으론 그 뜻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묻는다.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주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밭의 비유를 설명하여 주신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장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인즉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겐 허락되었으나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해 허락을 받아야만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말해 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일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에겐 성경이 있으며 또 그 성경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의 해석을 보자.

 좋은 땅에 뿌린 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어떻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된다. 말씀을 똑같이 들었으나 듣는 이들에 따라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다음 말씀을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 복음 13장 중에서…)

 왠지 상당히 매서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중간에 뽑지 않고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곡식과 함께 추수한다. 가라지는 먼저 불사르게 거두어 단으로 묶고 곡식은 주인의 곳간에 넣는다.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들으나 두려움으로 감히 묻지 못하고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성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를 더 가르치시고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에 대해 묻기로 한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 복음 13장 중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대로 상당히 무서운 것이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일이 있게 된다. 그러나 세상 끝에는 그들을 거두어 내어 불에 던져 넣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마귀의 자식들은 누구인가?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은 누구란 말인가? 나도 이 부분을 인하여 놀랐으며 인정하기 어려웠고 또 말하기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이란 강하며 부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과감히 그것을 전하고자 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 복음 13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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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3:43절 뒤에 있고 13:47절 앞에 있는 내용이다. 가라지를 곡식 중에서 갈라내어 불사르는 심판의 말씀 뒤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국을 사는 두 가지 비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까지 이어진다.

 어쩌면 이 두 가지 비유는 단순히 가치 있는 천국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만을 시사해 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비유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능히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두 비유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밭의 숨겨진 보물을 위해 하나는 극히 값진 진주를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 그것을 산다.

 천국을 위해 열심이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비유로서 그들을 격리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름대로 예수를 생각했다. 예수를 치료자로, 이적을 행하는 자로, 또는 왕으로, 또는 선지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를 따라다니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미리 알았고 들었다. 두려워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그들을 다시 만나실 때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령이 그들에게 오시자 구약의 기록된 말씀까지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을 과감히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스스로 자기와 같은 길을 걷기 원하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고자 한 것이다. 제자들의 존재 자체의 변화를 기대하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곧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첫째,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극히 아름다운 진주와 같은 예수 이름의 삶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하여 그 이름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이유는 그 예수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또 천국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또 병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니 그에게 간구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니 못할 일이 없다. 좋은 대학도 대 기업도 보내주시는 분이시니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찬송할 것이며 또 그의 말씀을 지키면 그가 기뻐하고 우리를 사랑하사 복을 주실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을 그분께 드리기를 아까워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에서 얼마를 다시 그분께 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그에게 보여야 한다.

 또 우리의 시간 중에서 얼마를 그를 위해 봉사해야 하며 다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또 십계명을 지키며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한다.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지킴으로 예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 비유는 천국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사람을 가르친다. 하나는 의인이요 곡식이다. 그러나 또 하나는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이요, 가라지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값진 천국을 얻고자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 바라보는 천국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천국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진리의 말씀을 왜곡시켰다. 그 결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의 구덩이에 빠졌다. 그것도 많은 소경들을 이끌고 말이다.

 그러나 소경이요, 귀머거리이기 때문에 그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이 일의 심각성을 깨닫기를 바란다. 거짓선지자들을 불 못 속에 던질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결국 모든 책임은 각각의 개인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선택한 그 결과를 그들은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의 모습을 벗어버리자. 그리고 진정한 예수의 이름을 가진 의인이 되기 위해 걸음을 시작해 보는 것이다. 아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 복음 13장 중에서…)

 새 계명이라 하면 옛 계명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옛 계명을 지키고 또 새 계명도 지켜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제는 새 계명만 지켜도 된다는 뜻인가? 분명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옛 계명은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십계명이다. 이것은 율법이 폐함처럼 함께 폐함을 당하였고 그 율법의 목적인 영생을 이룸으로 완성된 것과 같이 또한 새 계명을 따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는 십계명을 다시 지킬 필요가 없고 새 계명만을 지키면 그 안에서 그 십계명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실제로 적용하면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일단은 십계명에 대한 문제이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을까 하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등 이런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선 공공연히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윤리로서 십계명을 제시한 것이다. 반면에 새 계명에 대한 가르침은 상당히 왜곡되어 전달되었다. 새 계명은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하라는 뜻으로 가르쳐진 것이다. 이웃과는 다른 영역에서의 차이만을 두는 성도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의미로 가르쳐진 것이다. 심지어 율법까지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율법은 폐함을 당하였고 그 옛 계명 또한 함께 폐하여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새 계명일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새 계명은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명하사 지키라 하신 것이었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한 것이었다.

 이 한가지만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안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옛 계명은 쉽게 두 가지 내용으로 함축된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이 율법과는 달리 지킴으로 점진적인 성장과 함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내며 그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중에서…)

 다시 말해 새 계명은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며 예수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고 그 사랑을 따라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단편이 아닌 예수의 사랑을 배우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익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봐야 할 존재 자체의 변화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닌 전혀 다른 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이요, 예수의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배운 것을 말하며 그에게서 보고들은 것을 행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 복음 15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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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안에 거한다는 의미를 알기 위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예수는 포도나무요, 내가 그의 가지라면 당연히 나는 열매를 맺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열매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내게서 그런 열매가 맺었는지 확신하는 것도 어려웠었다.

 그렇지만 예수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에는 분명했다. 주의 말씀이 없이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을 위하여 이것도 저것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그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가 기뻐하는 일들을 행하는 것이다. 또 그가 말씀한 것들을 깨달으며 그가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갖는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요셉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또 예수처럼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계명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생명의 언약의 피와 영원한 양식인 그의 살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무죄한 자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저주 받은 모습으로 신 포도주도 마시지 않은 채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시는 것이다.

 나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그렇다고 그의 안에 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 중에 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예수 안에 거하고 있는 자인 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그의 계명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 복음 15장 중에서…)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조금 더 분명한 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의 사랑 안에 어떻게 거하는 것일까?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했다고 설명해 주신다.

 그렇다면 예수의 계명을 지키면 그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계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15: 12절에 보면 새 계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렇다면 단지 예수의 새 계명만을 지키기만 하면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요, 절로 열매를 맺는 원천을 얻게 되는 것인가? 놀랍지 아니한가? 단지 예수의 새 계명만을 지키기만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지키지 않아도 열매를 절로 맺게 된다니 말이다. 과연 새 계명은 어떤 것이기에 모든 것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 복음 13장 중에서…)

 새 계명의 우선되는 것은 예수의 사랑을 아는 것에 있다. 그런 다음 그 사랑을 가지고 서로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엔 놀라운 비밀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요, 둘째는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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