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예수의 이름으로 | 3. 사랑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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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322회 14-06-23 22:00본문
3. 사랑의 하나님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일을 시작해보도록 한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의 계명을 지킬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예수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사랑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해야만 하고 그런 다음 그 사랑을 기반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분명 같은 예수의 이름을 가진 자들이 된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난 자들만이 이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 복음 17장 중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요,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삼위일체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는 것과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다.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를 잠시 해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하나님께서는 세 분이시다. 보통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나타나지는 이 세 분이 하나님이 되신다. 각각의 존재들이 서로에게 인격이 되고 개체가 된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셋이라는 개념이 더욱 맞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분들께서는 셋이 아닌 하나라고 주장하고 계신다. 이것은 큰 비밀이요, 숨겨져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시는 이 비밀은 매우 난해한 부분이다.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 어렵고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조금 망설여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이해한다면 조금 낫지 않겠는가? 전부가 아니더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기에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비밀은 사실 그리 어렵진 않은 것이다.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매우 특이한 것이어서 결코 인간에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또한 쉽게 설명하거나 이해되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 보내신 성령의 도움으로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성령으로만, 반드시 이 부분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있는 사랑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사랑은 어떻게든 욕심에 가까운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 사랑을 행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고 인정될 수 있기까지 할 정도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을 나타내 주셨고 이 사랑에 이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 이 비밀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존재가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개체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의 중심에 있는 것이요, 우리에게 알게 하고자 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에 대한 이해를 이제 시작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적인 이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자기 이름으로 오지 않으셨고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으며 자기의 뜻을 전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전파하셨다. 이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 일서 4장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로 보내신 것에 있다. 먼저 이 사랑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랑을 먼저 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보다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 사랑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너무 부족했으며 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혀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가 삶 속에서 주를 아무리 부인한다 할 지라도 주는 아버지요 그들은 자녀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하실 것이요, 지옥에 결코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고 있으시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만일 자녀가 아니라 뱀이요, 독사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들을 버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아멘!
또 주의 말씀에 반드시 이러이러하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그 말씀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럴 때에 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낸다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정확한 의미로써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이다.
우리 식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사랑의 의미로써 말이다. 이 사랑이란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시는 것이요, 그 이름 안에서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함으로 거짓으로 자기를 가리우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거짓을 행하려 했으나 어찌 하나님께서 이를 알지 못하시겠는가. 이러므로 지적인 이해가 우리에게 얼마만큼 절실하며 중요한 것인지를 이젠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은 사실 아주 분명하고 간결하게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이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가 알기를 바라는 그것 곧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면 충분하다. 여기에 어떤 다른 것을 더하겠는가? 더하는 자가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결한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며 또한 이를 중심에 새기는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주님과 함께 이어가야 할 것이다. 아멘!
정적인 이해
주님과 함께 행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마음을 느끼는 자가 되겠고 주님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을 정적인 이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에서 나는 한가지 글을 소개할까 한다. 그 글은 내가 95년 4월 6일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그 때의 생각을 정리해 놓았던 글이다. 지금과는 약간의 생각의 차이는 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든지 신부에 관한 것과 같은 것,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비춰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실제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며, 또한 정적인 이해라는 부분에 있어 매우 좋은 소재를 주기도 한다. 이 글을 어제 발견했다. 주께서 무언가를 원하신다면 그것을 행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주의 뜻을 따라 이 글을 그대로 올리고자 하는 것이다.
인용글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만일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크게 놀랄 것이다. 사람 중에는 자기의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의미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어떤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과 오랫동안 생활하고 또 그분의 행사를 보며 그 분에 대해 이해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또 생각하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이상히 여길 때에 그 모든 것의 이유로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본 적도 없고 함께 행하지도 못하면서 어찌 의문을 품으며 이상히 여겨서 비밀 곧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어떻게 되었든 그것을 보고 의문을 갖게 되었고 또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것을 알게 된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길 뿐이다. 많은 사람 중에 내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기로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이것을 기록하는 오늘에 심히 괴로워하는 때이다.
혹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알았기로 괴로워하는구나 할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 자신이 딜레마에 빠져 괴로운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을 간절히 생각함으로 내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러할지라도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이것을 읽는 자로 하여금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고 싶은가? 그러면 먼저 계시를 받아야 한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은 종종 있지만 굳이 성경 이외에 다른 말로 표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계시를 받아야 한다.
나는 계시를 받았다. 나는 성령의 은혜 속에서 충만함을 받았다. 그가 나를 감동하시고 내 지혜를 넘치게 하시며 성경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깨닫게 하셨다.
그가 내게 첫 번째 가르쳐 보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살과 피를 어떻게 주셨는가를 보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는 것을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예수님을 버리셨나이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을 버린 이유가 차마 나를 대신해서 얻고자 한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송명희 시인의 시를 기억했다. ‘너의 쓴 잔을 내가 마시었고’ 나는 고맙고 감사했다. 나는 눈물보다 담담한 기쁨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처음엔 울지 않았다. 기뻤고 감사했다. 나의 모든 죄의 짐이 벗겨졌고 나의 모든 고민이 결론을 맺었다.
나는 예수를 사랑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시작이었다. 나는 성경을 읽기 좋아했다. 너무 감동적이었고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다윗을 알았을 때에 사건 사건마다 울기도 웃기도 했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단순해진 것 같았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께서 내게 감동하셨고 그때마다 내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내게 묻기도 했다. 나는 대답을 그럴 듯하게 잘하게 되었다. 나는 기도를 꽤 잘하게 되었다. 내 기도는 거의 성경을 인용한 것 같았다. 성령이 내게 가르치실 때에 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을 성령께서 해석해 주셨다. 왜 이러한 일이 있는지 분명히 알게 하셨다. 내가 묻는 것에 그의 대답은 더디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땅한 이유를 갖지 않고 물을 때엔 그것을 내게 깨닫게 하셨다.
나는 점차 모든 의문에 답을 갖게 되었다.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았다. 병을 고치기도 했고 예언을 하기도 했다. 나는 처음 성령께서 나를 이끄실 때에 한 가지를 이상히 생각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음성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셨다. 분명한 말씀을 해 주셨지만 내가 그것을 표현하기엔 너무 어렸다. 또 어떨 땐 내가 그냥 성경을 읽은 게 깨닫게 되는 것 같은 현상인 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안다. 성령은 나와 함께 하셨고 나를 친히 가르치셨다.
나는 역사에 관해 배워 나갔다. 성령이 내게 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천지 창조는 어림도 없는 세계였다. 그러나 내게 지혜를 주셨고 그것을 다만 조금 알게 하셨다.
나는 그 느낌을 기억한다. 영화 속의 우주 전쟁과는 달랐다. 어떻게 표현하면 적당할까? 내가 지혜 없이 경험했더라면 두려움 속에 빠질 세계였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신뢰가 없었더라면 벌레와 같이 무가치하고 비 존재자로 느꼈을 것이다.
분명 천지를 창조했을 때의 모습은 엄청난 것이었다. 내가 신학자에게 말하는 것보다 세계적인 또는 실질적인 과학자나 아인슈타인에게 말하는 게 더욱 나을 것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실 때에 그 빛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 말하면 나를 미쳤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그 빛은 온 우주의 질서를 만들게 했다. 근본적인 힘이었다. 혹성과 혹성 사이를 태양계를 은하계를 심지어 원자와 원자 사이를 무질서에서 질서에로의 위치를 갖게 했던 힘이었다.
그것을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 빛이 내게도 좋아 보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물과 물을 나누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었다. 그것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에서 하늘과 땅을 펴셨다고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늘 위에 흐르는 물과 땅 위에 흐르는 물 사이 그곳에는 어떠한 질병도 있을 수 없는 완벽한 낙원인 것이다.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물을 바다라 땅을 뭍이라고 칭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모든 만물을 조성하신 것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지금 할 때가 못 된다. 그것은 영원한 시간이 있을 때 해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에 대해 배웠다. 처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그리고 간교한 짐승 뱀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유를 모를 것이었다. 에덴의 구성은 마치 무대와 같았다. 어떤 이유로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지를 모를 일이었다.
모세의 기록은 문명에 죄가 어떻게 들어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을 했던 것이다. 모세는 분명 본 대로 기록했다. 왜냐하면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비밀스럽게 감추면서 성경을 기록해 나갔다. 비밀투성이로 창세기는 이어졌고, 언젠가는 풀릴 것처럼 봉해진 것 같았다.
나는 창세기에 대해 의문만을 갖고 있다. 물어도 물어도 풀기엔 너무 많고 뿌리가 깊다. 나는 그러한 인물이 되지 못하겠고 그러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며 ‘내가 이 백성을 순식간에 진멸하리라. 그리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었다. 그 분은 하나님이고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하나님의 백성 삼만을 죽이셨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실 때에 민족이 사라지는 것은 고사하고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참으신다.
이사야라든지 예레미야 등 선지자들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더럽고 사악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죄악 중에 있으며 심히 부패했고 선이라고는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사람 중에 죄가 없는 자가 있을까? 혹 누가 이르기를 ‘아니다! 누구누구는 의롭지 아니한가?’ 라고 한다면 내가 그에게 이르리라. 그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내가 그의 수치를 드러내리라. 그가 오지 못하리니 그의 죄가 그의 발을 금할 것임이라.
내가 아나니 인생의 종착점이 이르기 전에 죄를 쌓는 자신을 보게 됨 같이 인생의 시작에 가능성을 자신에게서 찾겠고, 또 그 일이 자기에게 이룸을 자신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왜 분노하시고 크게 진노하시는 것일까? 사자가 새끼 양을 그 어미 앞에서 움키는 것을 보면 주께서 진노하시는가?
혹은 저 사자가 심히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였으니 내가 저를 죽이리라 하시는가? 혹은 사자에게 이르기를 돌이키라. 네 악과 죄를 버리고 돌이키면 내가 너를 향하여 진노를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만일 그러하면 사람인 우매자라도 웃을 것이다.
왜 인생에게만 주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가? 그것은 인생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 졌음이요, 선악을 분별하기 때문이 아닌가? 또 주께서 인생을 사랑하시지 않으면 어찌 이같이 말씀하시겠는가? 우리의 머리털 수까지 세시는 하나님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대답 이외에 적당한 말이 있단 말인가?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우리에게 해명하시기까지 했는데 그 일은 심히 기이하여 사람으로 놀라게 하며 천사들도 놀랄 일이라. 곧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형상으로 보내어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게 하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께서 인자를 사랑하신 것이 어찌나 크던지 아들을 버리사 대속물로 주기까지 하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할 것이라. 그의 행사를 노래하고 전파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그치지 않았으니 이는 아버지를 믿지 않는 자가 아들도 믿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쉬지 아니 함이요, 심판이 예비된 이유이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증인이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요, 그는 두 감람나무이며 온 세상 앞에서 주를 모셔서는 자이다.
그가 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신다. 지혜 없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말하면 그가 듣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나를 구원하라 할 것이요, 지혜로운 이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고 말하면 그 말을 내게 알게 하라고 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주께서 저를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시겠고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도 합당치 않으리라.
(2). 사랑의 이유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궁금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지 감히 알고 싶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토록 사랑하게 만드는 것일까?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고 그 그릇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 사랑이 자기 아들까지 내어 줄 사랑인가? 그 그릇이 과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한 낱 그릇에 불과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에 빠지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세상엔 남자와 여자가 많다. 사랑의 이야기도 많다. 그 이야기는 사람으로 행복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사랑을 해 보았으면 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이룬 자가 누구인가? 그 사랑의 이야기를 내게 가르쳐 달라.
무엇이 남자로 하여금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것일까? 또 여자로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것일까? 나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백마를 탄 왕자 이야기 보다는 눈부신 아름다운 여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눈부신 완벽한 아름다움을 소유한 여인을 안다. 그 여인은 술람미 여인이다. 그 여인은 비둘기 같은 눈동자에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인 무리 염소요, 입술은 홍색 실 같고 입은 어여쁘고 뺨은 석류 한쪽 같다.
그 여인은 아무 흠이 없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과연 왕 솔로몬이 사랑할 만한 여인이었다. 신부에 대한 사랑의 이유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한 둘은 그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흠이 없이 아름다운 인자가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 아름다운 사람을 나는 신부라고 생각한다.
신부가 있다. ‘두 증인’ 그가 나는 신부라고 생각한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의 결혼식 멋지지 않는가? 생명나무의 길은 이렇게 이르는 게 아닐까? 나는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서 보고들은 모든 것을 토대로 내가 생각해 낸 것을 표현할 뿐이다.
주께서 내게 그것을 말씀하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답하길 바란다.
계시록의 신부의 모습은 예루살렘 성이다. 열두 진주 문이 달린 성이다. 그 열두 진주 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열두 지파의 십사만 사천을 말하는 것이며 그들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진짜 종이며 그들은 가증한 일로 인해 탄식하던 자들이다. 후에 그들이 주께 들으심을 입었고 이들만이 처음으로 영화의 몸을 입는 첫 열매가 된다.
두 증인을 통하지 않고는 성전인 하나님과 어린양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며 열두 문인 열두 지파의 십사만 사천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성의 아름다움에 관해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에 빠질 만한 아름다움은 두 증인인 신부에게 있다.
나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소유한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완전한 아름다움이 예루살렘 성인 신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신부는 예수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온 교회의 연합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연합을 최종적으로 이루는 자가 있는데 그가 두 증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광을 누구든지 취하여 얻기를 바란다. 나는 이 일에 관하여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면 내가 그를 알아 볼 줄로 믿는다.
하나님이 사랑에 빠진 이유는 현재의 인간 상태에 있던 게 아니라 오직 이룰 영원한 도성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참고 참는 이유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소유한 신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당하지 않는가? 나는 적어도 그렇게 이해했다. 주께서 이로 인하여 나를 책망하지 않으시리라.
나는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 줄 만한 이유와 아들이 순종한 이유는 과연 이 아름다움이 원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이룰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신이 되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께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 앞에서 믿음으로 생각한 것이다. 다만 사랑의 하나님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함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3). 눈물의 이유
나는 자주 우는 편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이유를 잘 모른다. 내 생각엔 우리 모두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 상관없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눈물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 자신도 합당치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나의 눈물의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미 잃어버린 사람의 허상 가운데 그것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것뿐 지금은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전엔 그들을 내가 사랑했었다.
그들이 대부분 죄 아래 있었고 심지어 귀신의 압제나 질병 가운데 또 삶의 틀 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에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놀랐다. 나는 내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계명을 지킬 것과 내 생명을 주를 위해 드릴 것을 다짐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아름답지 않았고 아무도 돌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멸시했고 이용만 하려고 했다. 나는 예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을 그들에게로 던졌다. 그의 외모를 보지 않고 다만 주께서 사랑하신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내 마음과 시간과 필요한 모든 것을 써서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그들은 약했고 의심이 많고 상처투성이였다. 내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신뢰를 얻기 전까지는 무척 힘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애썼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보여진 것 같았다. 나는 실제로 그러했고 내 자신도 그러한 내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아니라 예수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들을 대할 때에 내가 아닌 예수님이 내 안에서 말씀했고 나는 주님이 말하는 때에 방해하지 않고 내 맡겼다. 그때에 나는 주님의 행사에 무척 많이 놀랐다. 너무 위험해 보였고 마치 공중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그 교회의 목회자와 부딪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따라 행했고 나는 마치 사랑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3년이 넘었을 때 나는 주께 괴로움 속에서 묻게 되었다.
‘주여! 내가 무엇이니이까? 주는 뉘 시오며 무엇이니이까? 나는 말뿐인 인생입니다. 보소서! 나는 속성이 부패했고 나는 더러우나 주는 깨끗하시고 아름다우시나이다. 그러나 나는 미천하오니 주여! 내가 심히 부끄럽고 괴롭나이다.’ 그 때에 주님은 내게 답하셨다.
‘너도 나와 같이 사랑의 실체가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나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헛되구나. 다만 나도 하나님처럼 되야 하겠고 하나님처럼 내 자신도 사랑이 되어야 하겠구나. 나는 그때부터 서서히 바뀌어 갔다. 나도 사랑의 실체가 되어 가는 것을 깨달았다.
전엔 주님만 보았지만 나도 내 안에서 주님처럼 느끼고 주님처럼 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주님처럼 생각했고 나도 주님처럼 상당히 느껴지게 되었다.
인용글 마침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난해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 인용 글이 오히려 더욱 좋은 자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 개인에게 이루어진 삶이 이 글을 통해 매우 잘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부분들이 옳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적인 이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자료가 되지 않겠는가?
주님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 곧 이것이 정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또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정적인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과 함께하는 자는 그 시간과 함께 많은 일들을 행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멘!

만남
지적인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속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이 정적인 이해란 만남이라는 연속적 사건과 그 시간들 속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정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어떻게 만나며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아셨고 나도 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나의 시작을 아셨고 나의 성장과정도 지켜보았다. 나는 그분이 그렇게 하심을 느꼈고 내가 그것을 확인하기까지 단지 믿음뿐이었다. 그것이 내게 확인되는 일이 있을 때에 내가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 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한복음 6장 중에서…)
그렇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결코 예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나타내시며, 구원하사 영원한 생명에게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는 자가 교회를 다니며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자보다도 오히려 주 앞에서 더욱 인정을 받겠고 구원에 가까울 것이라 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겠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부르짖기를 시작하고 산 위에 오르며 금식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매우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들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요,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하면 주께서 기뻐하실 것이요, 예수를 우리 마음에 나타내 주실 것이다.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은 성경에서 보여준 이사야나 바울 같은 경우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충분히 성장되었을 때에 주께서 자기 일을 위하여 그들을 부르심이요, 또 그들을 보내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만남이란 그런 만남 전에 하나님을 알기 위한, 다시 말해 그와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 만남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와 관계를 이루기 위한 만남은 먼저 복음을 믿는 것이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죄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죄 사함을 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악한 영이 그에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거짓으로 죄사함을 주더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우리는 당장에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성령의 충만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만 결코 그렇게 쉽게 이룬 자는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죽기 전까지 하나님을 알고 죄사함을 받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자. 죄인으로 사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긍휼인 것이다.
그 긍휼을 얻은 이가 영광을 얻는 이로 바뀔지라도 그는 영광을 바란 것이 아니요, 오직 긍휼을 바랬던 것이다. 죄와 사망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자. 그때에 보게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아버지이다. 이것이 만남이다. 그 다음엔 그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모르는 관계에서 아는 관계로, 원수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푸신 그 살과 피로 세워진 언약을 아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는 자기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이 되셨고 또 음료가 되셨다.
이 생명의 피로 언약을 세우셨는데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 곧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한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 죄를 대신 지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먼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또 그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또 그의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와 합하여 한 몸이 되었고 한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증거로 성령을 주신다. 성령 그분께서 오셔서 그 이름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시며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끄신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이루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는 것이 또 그 이름을 더럽게 여기고 세상의 욕심대로 다시 사는 것만이 남는다. 이 사람은 다시 회개케 하여 사함을 얻을 수 없고 무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겠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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