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 | 2.사람들이 만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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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448회 14-06-28 17:08본문
2. 사람들이 만든 교회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던 나는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역사 곧 사람들의 역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굉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상을 근거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뒤틀렸을 뿐 아니라 그 근원이 과연 성경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이룬 것처럼 사람들이 만든 교회는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보고 성경으로 돌아가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으나 이들 또한 성경의 해석이 어렵고 그 분량마저 많아서 단지 그 시대의 교회를 비판하고 단지 그 모양을 조금 벗어나는 것 외엔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단지 그 시대의 교회와는 다른 모습을 할 뿐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크게 나아지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모습 또한 성경을 많이 닮았을 뿐 성경 속에 있었던 그런 하나님의 역사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생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맥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아셨고 은밀한 중에서라도 그들을 이끌어 오신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알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 자체 보단 그 구성원들 중에 있었으며 혹 어떤 때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엔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달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이어오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세운 교회는 그 시작부터 빗나간 것이었으며 그 과정과 결과마저도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 사람들이 세운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도록 한다. 이 모습을 지금 사람들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후에는 아는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우선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교회는 그 가치를 발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교회는 찬송이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예배 때마다 찬양이 있고 모임 때마다 찬송이 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에게서는 찬양이라는 커다란 문화가 성경보다도 더욱 큰 영향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은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는 이들마다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게 알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헌금제도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라고 가르친다. 성전건축헌금, 주일헌금, 선교헌금, 생일헌금, 구제헌금, 감사헌금, 구역별헌금, 부흥감사헌금, 절기헌금 등 이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는 그 규모가 커짐에 따라 상당히 중요시되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조직이다. 집사와 장로, 권사와 교사들 그리고 전도팀과 성가대 등 여러 가지 조직들의 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둘째는 행사이다. 부활절이나 추수 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이다. 또한 부흥성회와 여름성경학교, 수련회와 대심방 등이 있다.
셋째로 예식이 상당한 체계를 이루어간다 할 수 있다. 유아세례, 세례나 침례, 결혼식, 장례식, 성찬식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예식들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잘 집행하는 교회가 더욱 발전적이고 안정적으로 성장한 교회이며 또한 더 권위 있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일들을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 보자. 주께서 주신 지혜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들여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시각으로 이 모습들을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 번째 - 예배
예배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된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당장에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 주일에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일까? 왜 주일에 꼭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예수를 믿는 신앙이 그들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그들의 모습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들은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예수를 믿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자신이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의심할 만큼 이 예배는 교회에 있어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목회자는 약간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설교를 예배 중에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에 참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평이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는 설교에 대한 큰 부담을 느끼면서 예배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자였다면 그런 설교의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배가 자신이 하는 설교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상당한 부담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사실은 짧은 시간 속에서 자신의 교회를 더욱 성장시켜야만 할 말을 해야 하는 부담이 더욱 큰 것이 아닐까?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뭔가 강하고 멋진 말을 구상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러나 차라리 이들이 나은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이들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둘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분명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몇몇 목회자들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교회를 대교회로 성장시키는 일을 해 왔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지금의 현실은 교회 성장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 찬송
찬송은 찬송가와 복음성가로 구별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이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젊고 학력이 있는 이들이 복음송을 많이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음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전문적인 이해가 없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스펠은 일단 배우기 어려운 찬양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가스펠을 훨씬 좋아하고 많이 부른다. 또 그보다 방언으로 찬양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찬양을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부족하나마 작곡과 작사를 한다.
요즘 들어 나는 이런 새로운 찬양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는데 그 이유는 옛날에 알게 된 찬양이 지금의 찬양보다 훨씬 나은 요소를 더 많이 안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찬양은 단지 음악적 기법의 발전만이 컸을 뿐 곡 자체의 느낌이나 또한 내용의 깊이마저도 옛날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과연 하나님을 노래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오히려 세상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새로운 음악의 느낌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좋은가?
또한 지금의 찬양은 은혜 받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돼지는 경우가 더욱 많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찬양을 자기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문화 속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그 찬양을 찾는 것이며 그 무대에 서고자 찬양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들의 요구하는 모양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찬양은 언제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자기의 중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누군가의 찬양이 곧 내 안에서의 찬양으로 울려 나올 때에 비로소 찬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심으로의 찬양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평가하실 것이니 찬양하는 자는 또한 주 앞에서 주의 판단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기반이 되지 않는 찬양은 자기를 속이는 거짓된 찬양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 기도
기도는 그 모양이 다양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몇몇 모습으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자기의 생활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듯이 조그마한 소리로 고백하는 기도의 모습이 있다. 이는 젊은이들 사이에 많이 있는 기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는 소리를 크게 질러서 기도하는 모습이다. 대부분 반복되는 내용이 많으나 상당히 열정적으로 하기 때문인지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많으며 탄식하는 듯한 느낌으로 기도하는 경우도 많다.
셋째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각각의 교회의 특성을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목회자의 방언에 따라 닮아 가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기도를 할 때에 손을 마구 떨며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은 몸을 흔들면서 하는 이가 있고 또 어떤 이는 장시간 동안이나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기도의 모습이 불교에도 있으며 내림굿을 하는 무당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영접술을 하는 이들의 영접 방법과 기도하는 방법이 일치하는 것이며 또 맛보는 영접경의 체험하는 내용과 그들의 말과 행동이 거의 닮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이나 신이 내려 비밀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가 말하는 내용엔 왠지 분위기나 그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엔 우리의 기도와는 다른 무언가 독특한 향기가 있다. 믿음의 선진들의 기도는 대부분 엄청난 지식들이 기반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자기들의 시대를 판단하는 그들의 시각은 하나님의 보시는 시각과 거의 일치하기도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자기들이 무엇을 그릇 하였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도는 그러한 그들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기도했던 것을 생각해보자. 또 바울의 기도를 생각해보자. 그들의 기도엔 우리와는 다른 어떤 향기가 있다. 반면 우리의 기도엔 더럽고 조잡스런 귀신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기도 속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또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기도가 대부분이고 어떤 경우엔 영접 경을 맛보기 위한 영접 술을 기도라고 착각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기도 한다.
기도는 만남이 있는 이들의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이들이 하는 기도엔 독특한 향기가 있다. 이 향기로운 기도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며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시는 가증한 것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 헌금제도
어떤 교회는 오직 감사 헌금만이 있다고도 한다. 헌금 제도에 대한 여러 가지 이견들이 나옴으로 몇몇 교회들은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헌금 제도 없이는 결코 설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특히 십일조는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십일조를 하는 성도만이 진정한 성도이며 선교 헌금을 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과감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교회는 많은 헌금이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그 많은 영혼들이 또 많은 헌금을 낼 것을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헌금 제도는 아주 다양하게 발전했다.
헌금하기 어려운 성도들과 헌금하기를 좋아하는 성도로 만들려는 목회자와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오면서 헌금제도는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헌금을 많이 하는 이들을 아주 많이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 돈은 교회에 의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쓰여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헌금을 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벌어 교회에 헌금을 내고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율법아래 있는 이들에겐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드리는 헌금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다시 드리는 제사가 필요 없어졌고 제사장도 레위인도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영적 이스라엘이 된 이들은 십일조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으며 첫 소산도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또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헌금제도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원흉이며 모든 타락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 교회의 조직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교회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 관리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조직 관리는 보통 대교회로 가는 지름길이랄까? 그렇다면 왜 이토록 조직 관리가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직 관리는 보통 연령별로 나뉘기도 하며 특수목적을 위해 구성하기도 한다. 유치 부, 유년 부와 초등 부, 중등 부와 고등 부, 청년 1부 청년 2부, 여전도회, 남전도회 등이 연령별로 나눈 것이다. 또 특수 목적을 위해 구성된 조직은 성가대와 찬양팀, 전도팀과 대학부 등이 있다.
그리고 권찰, 집사, 권사, 장로, 교사, 간사, 교육 전도사, 심방 전도사, 전도사, 각 부서별 부장, 선교사, 부목, 담임 목사 등이 이러한 조직을 관리하는 직분자들이라 할 수 있다.
직분들에 관한 문제는 실로 그 뿌리가 깊어서 심한 다툼이 잦으며 심지어 교회가 당을 지어 나뉘는 현상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보통 헌금을 잘 내는 부유층의 사람들과 학력이 높은 지식층의 사람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소유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의 요지는 교회 안의 문화가 세상의 문화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직분들을 어떤 이들에게 주느냐 하는 것은 교회의 큰 골칫거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 관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직분자들에게 주워지는 직분들이 전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눠주신다고 했으며 또 각 사람에게 직분을 나눠주신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교회는 그의 몸이며 그 몸의 각 지체가 또한 교회들이며 성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킴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회가 예수를 머리로 삼은 그의 진정한 몸된 교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방법대로 만든 교회는 단지 거짓된 교회일 뿐인 것이다. 결코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이며 헛된 약속을 믿은 결과라 하겠다.
주께서는 밝히 드러내어 가르치기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옛적 이스라엘이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게 되었던 것처럼 이제도 하나님의 진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은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그 백성들에게 자기의 뜻을 감추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뜻을 전파하시는 전도자가 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태 복음 7장 중에서……)
여섯 번째 - 교회의 행사
부활절, 추수 감사절, 크리스마스, 부흥 성회, 여름 성경학교, 하계, 동계 수련회, 대심방 등등이 그것이다.
일곱 번째 - 교회의 예식
유아세례, 세례나 침례, 결혼식, 장례식, 성찬식 등이 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의 모임이 되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었을 뿐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 내가 말하지 못한다면 나는 단지 이 시대의 교회를 비판하는 자일 뿐일 것이다. 나는 단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고자 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참된 것 곧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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