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성경해석2 | 2.성경해석 네번째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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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345회 14-06-29 15:05본문
2. 성경해석 네번째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논제의 이유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서신들을 통하여 자기의 복음을 증거했다. 그가 제시한 복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매우 중요하여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대단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나는 바울이 제시한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자 했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하고자 했던 바울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마치 그 복음이 숨겨진 듯 했었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은 숨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직접 많은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증거하였었고 이제 떨어져 있는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다시금 복음을 증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먼저 증거한 바울의 복음이 어떠한 것임을 이제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할 뿐인 것이었다.

바울은 그의 복음에서 여러 가지를 말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자 했던 부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의 복음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심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사단의 간계로 말미암아 매우 왜곡되고 숨겨진 것들 중 하나가 된다. 마땅히 믿음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깊이 감추어지고 다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바울의 가르침만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떤 것인지, 또한 그 인도하심이 없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이 바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분들이 그 기반 자체가 흔들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 대한 해석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부분에 대한 해석 또한 교회의 형성 과정 중 가장 중심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런 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기존 교회를 부정하기 원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이 부분은 오히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예비된 크신 주의 배려라는 점일 것이다. 아멘!
주께서 바울을 통해 제시하셨던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는 부분들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사건의 배경
첫번째 이야기 - 성령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8장 중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로마서8장 중에서…)
바울의 복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 함은 하나님의 성령 곧 거룩한 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자가 아니요, 영에 거하는 자가 된다. 바울의 이 가르침은 과연 어떤 뜻인가? 사실 그렇게 어려운 내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제되는 몇 가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 부분은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제되는 첫 번째는 우리의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의 정리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또 어디에 거하는가? 우리는 육체 가운데 거하며 그 육체와 함께 죽음을 받아 드리게 된다. 육체가 없는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심지어 자기 존재의 가치 자체를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 또한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우리가 육신에 거하지 않고 영에 거한다고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말해 우리의 거처가 육체가 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되는 것을 우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 영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거처를 얻게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된다.
전제되는 또 하나는 자신이라고 느끼는 존재에 대한 평가가 된다. 과연 나는 무엇이며 또한 누구인가 하는 존재에 대한 느낌의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선악과의 결과 속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자아에 대한 죽음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임으로 인생을 시작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되는 우리의 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우리의 자아가 진정한 자아이며 그 느낌이 가장 정확하며 실질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의 결과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일지라도 인식하는 모든 세계가 그대로 존재함을 볼 수 있으니 무엇을 깨닫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자아에 대한 진정한 존재를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은 자가 느끼는 자아는 죽은 것이며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 없는 자아적 존재는 육체에 종 노릇 하는 노예일 뿐 진정한 존재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 두 전제를 고려해 보고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러면 그의 증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한결 쉬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다시 살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육체의 종 노릇했던 자아적 존재에서 변화하여 영에 거하게 될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서 영을 좇아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육체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임을 또한 증거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를 종 삼으려던 육체를 이제는 영으로써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를 종 삼으려는 것은 육체가 아니다. 다만 악한 자가 육체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우리를 잡으려는 것일 뿐이다. 바울이 제시하는 복음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 이 살리는 영에 관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의 복음은 시작되고 발전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리는 영
살리는 영이 아니면 바울의 복음은 헛된 것이 된다. 살리는 영으로 말미암아 그의 복음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주장했던 그의 위로조차도 성령의 법이 아니면 결코 실현되지 않는 허상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의 복음은 주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을 다시 살리심으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며 그 무엇보다도 먼저 제시 돼져야 할 바울의 복음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바울의 복음 중에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할이 그 중심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매우 분명한 것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를 이끌어 참된 생명으로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을 얻게 되며 율법의 요구보다도 더 완전한 것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 누군가가 자기 안에 주의 영이 계신 줄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버리운 자일 뿐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의 영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성령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매우 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이들은 스스로에게서 이와 같은 성령의 존재를 확인해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구원 받기만을 원했던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성령의 역할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에 우선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많은 고백과 봉사 그리고 헌신이 있었어도 성령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것도 또한 허락해 주지 않으셨다.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던 그들은 그 가운데에서 속히 벗어나기 위해 어두움의 존재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존재들의 도움을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마저도 속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단단케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그릇된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그 마음으로 둔하게, 또 둔하게 만들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놀라움이 있겠지만 알기 어려울 만큼 드문 것도 또 숨겨진 것도 아니니 쉽게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살리는 영은 모든 것을 바꾸며 모든 일의 중심에 서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믿음에 거하는 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이며 그의 가르침 가운데 자라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된다. 과거엔 율법을 지켜야만 의인이라 칭하셨지만 이제 예수를 믿는 자들이면 누구나 의로운 자라 칭하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과연 놀랄만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이 엄청난 소식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칭의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단지 예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 줄 알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의로운 자라 칭하시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단지 어떤 모임에 소속되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여러 가지 행동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바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아야 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5장 중에서…)
바울이 증거하는 복음은 주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이다. 주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그 값인 죽음이라는 것을 대신 치루셨다는 것이다. 곧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의 인생의 결말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이제 산 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새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을 또한 얻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회적인 면에서 매우 불안정한 모습으로 적용된다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자이면서도 죽은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가족으로부터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죽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또한 자신을 과거의 그로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또한 그렇게 고백해야만 한다.
그리고 고백뿐만이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과거의 그들로부터 다른 존재로 인정 받아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죄로 부터 혹은 사망으로 부터 자유를 얻는 것처럼 과거의 모든 관계로 부터 놓임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다. 예수를 믿음이 진정한 것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시험이나 환란이 닥칠 때에 주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자가 되지 않겠는가? 주께서는 이것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을 확인 하시며 과연 믿는 자이면 그의 믿음을 이제 의로 여기신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물로 성령을 허락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인치심이 이루어 진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성령은 그의 삶에 간섭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게 된다.
가르치시는 영
성령의 개입은 바울의 복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개입에 의해 새로운 세계는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개입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 과정도 매우 미묘하여 상당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우선 성령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직접적이거나 분명하진 않다.
오히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주 앞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이 되기도 하며, 주께 응답을 듣고자 하는 맘으로 다만 기다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주의 응답이 이렇게 생각하거나 저렇게 생각할 정도로 불분명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의 응답은 언제나 분명하며 그의 계시 또한 명확하다 할 수 있다.
다만 받아들이는 이가 어리므로 그 받아들이는것이 더디고 힘들어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소자일수록 어린아이를 대하시듯 부드럽게 대하시게 되며 장성한 사람일수록 직접적이고 분명한 일들을 제시하시게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려 한다. 모든 권한을 가지시나 억지로 하지 않으시고 자녀를 대함같이 어린아이를 대함같이 이끄신다. 그 가운데에서 성령께서는 진리를 알게 하시며 지혜와 지식을 주신다. 듣고자 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알고자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그가 단지 말씀하시기에 듣는 것이며 그가 깨닫게 하시므로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으려 노력하지도 말 것이며 알려 하지도 말 것이다. 다만 주께서 말씀하실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며 진실함으로 그를 향하여 서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된 것이 진리를 변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성령께서는 또한 각 사람과 모임 중에서 말씀하시며 각각의 사람에게 은사와 직분을 허락하신다. 그들이 주의 몸을 이룰 것이며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교회가 될 것이다.
또한 은사와 직분을 주심으로 어린 자로 하여금 온전한 가운데 성장 하도록 각각의 역할을 감당토록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자는 홀로 거하지 말 것이며 두세명 이상이 함께 거하여 서로를 도와야 할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각자의 본분을 다 행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두번째 이야기 - 율법과 은혜
바울의 복음에 있어 두 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율법에 관한 것이다. 그의 복음에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의 서신에 있어 이 율법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율법과 비교하여 은혜에 관한 부분도 빠지지 않고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를 인하여서일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율법을 버리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와 바울이 전한 복음 위에 다시금 거짓을 전하게 되었던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이를 인하여 다툼은 끊이질 않았으며 그 가운데에 거하는 교회의 소식은 바울에게까지 이른다. 때문에 바울은 그의 서신에 이 거짓된 자들이 행하려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할 필요를 느꼈으며 논란의 중심이 되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를 계시를 따라 전하게 된다.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견고한 것이었으며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로마교회에게 보낸 편지를 잠시 살펴 봄으로 이 이야기를 조금더 자세하게 보기로 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로마서 2장 중에서…)
율법 없이 자라난 이방인들은 분명 부정한 자들이며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몇몇 이방인들은 실제로 유대인들보다도 더 나은 믿음을 가졌었고 또한 더 정직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한결같이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들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그들은 알려 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들에게 있는 특권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방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믿음을 갖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선대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연고 없이 차별하고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이 악하고 부정했기 때문이며 언제라도 그들이 그 악에서 빠져 나오기를 애쓰고 하나님을 향하여 긍휼을 구한다면 그들이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주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또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선민의식 속에 빠져 진실을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자기들에게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뒤틀린 그들만의 세계를 바로잡지 못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은혜를 베푸셨고 유대인들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떤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여러 가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좋을 듯 싶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며 술과 담배를 금하고 음란과 도둑질을 피하며 한결같이 바르게 살기를 교육받은 이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어 자기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하여 회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술과 담배뿐 아니라 상당히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를 모를 때엔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이를 알게 된 후론 이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마음에 걸리게 되었다. 또한 그의 삶은 아직도 그리스도인 이라기엔 왠지 너무나 자유로운 면이 많아 보였다. 때문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지라도 아직은 여러 가지로 불안한 상태에 있구나 하였고 이제 내가 이 사람에게 일러 법도와 규례를 가르쳐야 하겠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이 사람의 생각은 좋은 것일까? 이런 일들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율법과 규례를 배우고 이것을 몸에 익히게 된다.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를 요구 받게 되며 그 요구에 상응하는 것이 그들에게서 좋은 믿음을 얻은 자라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처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생활은 성경을 통해 이룬 것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매우 이상할 정도로 뒤틀어진 결과물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건만 이들은 이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상관치 않고 다만 이를 행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 받으리라는 확신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단지 우리를 의롭게 하려 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을 가르치시는 것은 그가 의롭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완전함을 가르치심은 당신 자신이 완전함에 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와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셨고 우리의 마음으로 그를 친근히 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멀었다. 만일 이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자였다면 하나님의 진짜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 회심한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때에 진실함을 원했던 자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에게 멀었고 어떤 것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했고 그런 생을 찾으려고 애쓰던 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찾지 못한 채 연약한 자신의 모습만을 볼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하여 또한 원치 않는 삶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신을 인하여 괴로워하게 된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공허함과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했으며 그로 인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어릴 적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행하였으나 뒤틀려진 이 세상을 인하여 또한 나약한 자기 자신을 인하여 상처 받고 무너져 버려 그 결국이 매우 비참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는 많은 것들의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진정으로 얻고자 했던 생수의 강이 자기 안에 흐르게 됨을 느꼈으며 참된 생명의 길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건물이나 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한 사람 또한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어디에 거하든지 또한 어디로 향하든지 상관없으며 오직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일 뿐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주께서 이끄심이 있는 자는 어떤 곳이든 상관없이 그는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믿음 있는 자를 찾으시며 또한 주를 찾는 자를 찾으신다. 따라서 만나고자 하는 자는 만남을 반드시 얻게 될 것이다. 이 만남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령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이끄시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한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었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다만 자기들이 가진 오랜 전통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율법을 최고의 선물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이 율법을 따라 자기들도 지지 못했던 짐들을 이 이방인들에게도 지우게 하기 위해 온갖 힘을 다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이런 행위를 단호하게 깨뜨리고자 했다. 율법이 말하는 바가 단지 정죄의 역할뿐임을 알기에 율법을 가진 자들이 어떠한 결과에 이르게 될 줄도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율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제시하게 된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기 싫어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아무리 하나님께로 온 것일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낱 사람이 아무리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전통이라는 거인을 무너뜨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이 더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악함을 아신 하나님이 그 보응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지기를 허락하셨다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 악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원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미움을 받아 주 예수께 저주를 받아 주께로부터 떨어진다 하여도 원하는 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울은 간절했던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들의 이런 훼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과거의 율법이 무엇인지 그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매우 정확하게 밝혀나가게 된다. 이면적인 유대인과 마음에 베푸는 할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들,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사망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이라는 새 열매를 맺게 되는 지, 바울은 매우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설명한 후에 그가 이르기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논증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율법아래 있지 않으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따라 죄의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 값인 죽음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울의 이야기는 현실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만들어 주고 만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는 영생하리라 하심과 같이 그가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영생의 비밀은 바울에 의해 매우 잘 표현되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도 그것은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한 그의 말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도행전 8장 중에서…)
형제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시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율법의 정죄를 다시 받게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영을 따라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육신대로 살게 된다면 그는 오히려 반드시 죽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에게 지는 일은 결코 없다. 스스로가 죄에게 팔리는 일이 아니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바로 이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유대인과 같은 실수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 속에는 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믿는 것이 아닌 자기 존재의 상실과 새로운 삶, 또한 하나님의 영을 따라가는 새로운 영생의 길이 그가 가르치는 복음속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은 유대인들이 빠진 함정과 같은 곳에 다시금 빠져버렸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나 바울의 판단에 의해서도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인정 받지 못함을 이제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이 된다. 그들이 처음부터 소수가 될 것은 주께서도 아셨고 또한 믿음의 선진들도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상히 여길 일이 아니다. 또한 생명의 길이 좁고 협착한 것은 단지 까다로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 이루는 결국이 우리에게 커다란 것이 되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우리에게 사랑을 품으신 하나님의 존재가 그 이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가 있는가? 주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큰 사랑을 베푸셨고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이 되기 까지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다. 또한 모든 것을 그분께서 만드셨고 이루어 오셨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로 말미암아 났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그가 사랑이라는 커다란 존재임을 원망하겠는가? 아니면 그 사랑이 우리 사람에게 있음을 원망하겠는가? 우리가 그의 사랑을 입은 존재로써 이 세상에 난 자이면 그에 합당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며 그를 만나기 위한 인생을 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어릴 적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내 나름대로 행하였을지라도 성장한 후에는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사단의 간계로 말미암아 매우 절망한 적도 있었으며 어리석음에 잠시 머물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께서 내게 지혜를 주시며 싸울 힘을 주신고로 내가 그곳에서 급히 벗어날 수 있었다. 마땅히 인생이 그 시작할 때에 이를 생각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욕심에 이끌려 가는 것을 보았고 악한 이의 계교에 빠져 평생을 보내는 것 또한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깨닫기로 이 세상이 악한 자 아래에 처하였고 보여지는 모든 것이 악한 계교로 말미암은 것이로구나 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길을 막으려 함이며 누구든지 그 길을 찾으면 그 길을 어둡게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금 나은 자도 망하며 어리석은 자도 당연히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는 살겠고 그는 주의 긍휼을 입을 것이다. 아멘!
논제1.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이다. 우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의 이해에서 기반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 시작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나 여기에선 한 가지 측면으로만 전개하려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죄 아래에서의 자신의 삶을 죄인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죄의 대가로 죽음을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을 다시금 찾는 행위는 믿음에 대한 부정이요,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은혜를 발로 밟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철저히 지켜져야 할 언약이라 할 수 있다. 과거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관계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며 결코 다시금 그 과거의 삶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혈연과 친구에게라도 자신의 이름은 결코 사용할 수 없는 죽음의 티켓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산 자요, 다시금 죄 아래에 매이게 될 것이며 죄 값으로 죽음을 다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죽으실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그는 영원한 사망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는 극히 두려운 것이다.
또한, 이런 행위를 한 자는 그리스도를 욕보인 자들과 동일하게 취급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소홀히 여겼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결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주께서 경계하시기 위해 하신 것이라 확신한다.
주의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자들이 결코 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주께서도 매우 세심하게 살피신 후에라야 은혜 베푸심을 허락하신다. 결코 조금의 불안함도 용납하지 않음을 이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각 사람의 중심을 살피실 것이며 그 안에 믿음이 진정한 것이면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예수 이름을 허릭하여 주실 것이다.
죄사함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선물인 주의 성령이 그가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이름이다. 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이가 우리에게 오셔서 먼저 우리의 영을 살리신다. 죽어버린 우리의 영은 예수의 영에 의해 다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이 일에 관해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한다. 몸의 원함은 어떤 것인가? 과연 몸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그것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일까? 그것의 해답은 사도 요한을 통해 보여주신 요한일서가 가장 정확한 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2장 중에서…)
육체의 원함은 이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부터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무대로서의 이 세상을 인식하게 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 욕심이다.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세상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 욕심임이 틀림없다.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은 세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로 육체의 정욕이다. 이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성적인 욕구, 그리고 육체의 안락함 등을 말하는 것이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기 좋은 모든 것들을 소유하려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단지 취하려고 하는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이라 함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러 가지를 경영하며 또 많은 일들을 행하게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따라서는 안되는 일들이 이것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버지께로 온 것으로 자기 안을 채우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께로 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닮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아버지에 관해 듣게 되며 아버지를 배우게 된다. 위로부터 온 지혜를 얻게 되며 위로부터 난 모든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면 이 사람은 합당치 않는 자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육체의 원하는 바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것들이다.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거절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 안을 채우려고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의 시작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다.
그 후에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그 앞에서 그를 느끼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 말씀을 좇아 거치는 모든 것과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먼저는 육체가 그 대적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며 후에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의 싸움이요, 그 후에는 하늘에 있는 영들에 관한 싸움이 될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이라는 말을 말씀으로라는 말로 대체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그릇된 것이다. 아무리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의미를 틀어버릴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이런 행동은 그릇된 것이며 결코 피해야만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해야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자들을 위한 배려가 되는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은 육신대로 사는 것을 금하기 위한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요, 더 나아가 주의 영으로 새롭게 살게 된 우리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싸움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논제 두 번째에서 이 부분을 다루는 것은 바울의 복음에 있어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일이 그 시작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기반이 이처럼 영적인 존재로서 시작하는 것이 되고 그 싸움에 항상 이기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담대해질 것이고 주 앞에서도 부끄럼 없이 서게 될 것이다. 아멘!
논제2. 바울의 싸움은 거짓된 교회와의 싸움이다
논제 세 번째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바울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바울의 서신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 있어 가장 많이 겪어야 했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도 이 싸움은 계속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가장 위험하고 사단의 주 전력이 되는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단은 교회의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세우려 했고 그 계획은 대부분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가 강하고 지혜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곳에서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마음이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우상을 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마음으로 우상을 그려낸 것과 그 그려낸 하나님이 힘이 있어 자기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마음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손으로 빚어 만든 것이 과연 그를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 마저 그들에게 우상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이 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을 향하여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것일지라도 우상이 된다.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그는 우상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상이 있어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그것도 우상이다. 만일 어떤 이가 생각으로 하나님을 그려내고 그를 섬긴 다면 그도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으로 그려낼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그는 우리가 결코 헤아리기 어려운 존재이며 그 행사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것들이다.
만일 어떤 이가 하나님과 수십 년을 동행하며 그의 행사를 보고 그의 말씀을 항상 들었을지라도 그는 그 하나님을 예측한다 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예측한 것이 맞을 지라도 그가 이르기를 나의 예측이 맞았도다 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잠잠히 주의 행사를 지켜 볼 것이며 그에게 이것 저것을 물으며 진실히 행하는 법을 배워 나갈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눈 앞에서 보고도 알지 못한 자요,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던 자들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은 과거에 얽매여 있던 자들이라 할 수 있으며 과거의 선진들의 말에 집착해 있던 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상들이 주의 보내신 선지자들에게 하듯 그들도 똑같이 행함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제 바울이 이르기를 ‘하나님은 너희에게 이러하시다.’할지라도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의 하나님을 주장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을 핍박했으며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를 쫒게 된다.
과연 그들이 바라보던 하나님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울을 죽이기로 꾀했던 그들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과거의 율법과 과거로부터 온 지식으로부터 자기들의 행하는 일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도 자기들이 행하는 일에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되신 하나님은 바울에게 있었고 그들에게는 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이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이들인지 먼저 아셨고 또한 매우 오래도록 쌓아놓은 분노를 그들에게 갚으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들이 단순히 어리석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다시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 뒤에 있는 사단의 계교를 분명히 아시며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 속히 피하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하늘에 사무친 진노를 받지말라하시며 그 가운데에서 급히 피하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이를 들을 귀가 있는 지가 오히려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럴지라도 이 하늘의 심판은 반드시 이 땅 가운데에서 속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이를 때에 그 진노를 피할 자가 누구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아멘!
바울이 싸워야 했던 대상은 다름아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이 바울을 향하여 진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울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셨다고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였을지라도 자기들의 전통과 과거의 율법에서는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이 가진 자유를 깨뜨리고자 했으며 자기들의 종으로 삼고자 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증거하려고 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제시했을 지라도 결국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커다란 교회를 형성하려 했을 뿐인 것이다. 커다란 세력과 절대적 권력을 얻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배경에 사단이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나지 않았음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의 싸움은 매우 치열하고 격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싸움은 단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들에 관한 싸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바울이 주께로 돌아간 후에 지친 교회를 향하여 손을 내밀어 구원하려 했던 자가 있었다. 은밀히 행하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을 노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에 빠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앎이요,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거대 교회의 시대가 이르렀고 제각기 자기들의 교회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이미 많이 있을 지라도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이끄실 것이다. 예수를 믿는 이가 많이 있을 지라도 그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이는 매우 적다 할 수 있다.
이제 다시 이 싸움이 시작 될 때에 먼저 알 것은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무엇으로 자기의 믿음을 지키겠는가? 결국 자기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전통과 선진들이 남긴 교훈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만을 하게 될 뿐일 것이다.
바울의 싸움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성경 전체에서 비춰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종을 보내었던가? 이제는 이미 버림받은 이스라엘에게가 아닌가? 왜 그들이 버림받게 되었던가? 그것은 그들이 열매 없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방인인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열매 맺는 백성이 될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부정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 되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천국은 열매 맺는 백성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침노를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이들이 일어나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주께서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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