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성경해석2 | 성경해석에 관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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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131회 14-06-29 15:06본문
성경해석에 관하여(2)
바울의 삶과 그가 증거한 복음은 나의 삶에 있어 하나의 획을 그을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바울이 “영으로써” 라는 말을 할 때에 그 의미는 내게서 너무나 먼 것이었다. 영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인지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었다. 주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개념과 법과 말씀 그리고 영이라는 개념들 이런 것들은 서로 매우 비슷했으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들이 지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이르시고 나를 이곳 저곳으로 이끄심으로 여러 가지를 경험케 하셨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었으므로 생소함이 오히려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시로 나 자신은 경험이라는 이 세계의 재료를 가지고 주를 이해하려는 성향이 보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것은 깨뜨려야 할 것들이 되었을 뿐이다. 이런 일의 과정은 마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식이라는 자기만의 감각을 기반으로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익혀나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모든 세계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두셨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의 말씀을 모으셨고 이 말씀으로 능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의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주의 영이 없다면 결코 성경은 풀리지 않는 비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누가 억지로 성경을 풀려고 한다면 그는 오히려 반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거나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어떤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가르침이 없는 상태에서 보게 되는 성경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이들을 사로잡으려는 덫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또한 논리를 기반으로 자세히 성경을 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빠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함정과 유혹이 널려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혜를 기반으로 이를 알려 한다 하더라도 완전한 지혜를 갖지 않는다면 이는 또다시 풀 수 없는 답답함에 견딜 수 없어 다른 여러 가지 추론과 상상 속에서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고 만다. 이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가르침만이 성경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이다.
성경해석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성경 속에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했던 일들을 다시 반복하려 함일 뿐이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내가 이르는 말이 떡에 관한 것이 아님을 너희가 어찌 알지 못하느냐.” 하셨고 또한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것을 알지 못할진대 더 큰 비유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 하셨다.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의 마음으로 예민하게 하려 함이요,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려 함이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이르시겠다 하셨고 과연 성령이 오실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심과 같이 그가 말씀하셨고 또한 모든 것들을 이끌어 나가셨다. 성령이 오셨을 때에 베드로는 요엘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매우 어려운 문제였고 결코 풀리지 않는 난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베드로는 학문을 하지 않았어도 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성령이 그로 학자의 지혜와 마음을 주신 연고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다. 이는 학자에게 열리는 세계가 아니라 주의 마음을 아는 자에게 열리는 세계였던 것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말씀하신 이가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지와 무엇을 말씀하려 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세계가 이 말씀인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들에게 있어 이 세계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에게 있어 이 세계는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었고 또한 자신이 보고 듣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의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되었을 때 그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는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때문에 요엘로 하신 말씀이 지금 자기들에게 일어난 이 일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들이 무엇을 예언하고 있는지도 그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먼 후의 일들을 그는 보게 되었으며 과거의 일들도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주 앞에서 보고 들은 많은 것들을 서신으로 우리에게 남기게 되었다.
베드로의 서신은 매우 어렵지만 그 의미는 분명한 것이다.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서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 있어 이 성경은 하나님께 나가는 좋은 길이 되어준다.
우리가 성경해석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을 스스로가 증거하사 그 해석을 보이고자 하셨고 그의 제자들도 그를 본받아 그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해석하는 일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고백적인 요소가 담겨있으며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반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시대적인 면을 매우 잘 적용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자는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려 함이요, 그렇지 않는 자는 그 가운데에서 제하려 함이다. 누룩을 제거함처럼 모임 중에 있는 거짓형제를 제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명을 지킬 수 없게 돼 버리거나 온 덩이를 전부 버릴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잔인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면 이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지금의 거짓된 교회는 그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단순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교회가운데로 들였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처음부터 주께로 인정 받지 못한 자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과정 속에서 거짓된 그리스도인으로 속인 것이 드러나 입증된다면 당연히 그를 회중에서 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 가운데에 있는 어린 자들과 성도들이 성결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만이 유업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종은 이 복을 받지 못하리니 그 집에서 내어 쫒아내라하심처럼 우리는 내어 보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 온 덩이를 보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석은 진정한 믿음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게 좋은 지혜를 빌려주게 될 것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는 불과 같을 것이며 치는 방망이와 같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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