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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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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366회 25-01-11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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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 두번째

 
 
"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 
 
 
 > 는 요한이 전하는 두번째 표적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이들을 쫒아내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게 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하신다. 그러면 사흘만에 그 성전을 다시 일으키겠다 하신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다. 수많은 이들을 동원하어 46년동안이나 지은 이 성전을 단 사흘만에 복원한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말도 안되는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표적을 보고자 한다면 정말로 성전을 헐어야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성전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조차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이 말의 진정한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표적을 해석하자면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라 하였으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그런 뜻이 된다. 또한 사흘만에 성전을 다시 일으키겠다 하였으니, 죽은지 사흘만에 예수께서 다시 부활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 표적엔 그들이 기대하던 그런 놀라운 기적은 없었다.
 
> 그러나 이는 그보다 더욱 놀라운 그런 기적이 아니던가?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그가 죄없는 의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말씀하신대로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표적에 숨겨져 있는 진짜 비밀이다. 요한은 이 표적을 예수께서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라 기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표적은 사실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표적들을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펼쳐오셨다.
 
> 사람들에게 이 기적과도 같은 표적을 보이면 그들이 믿으리라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표적을 보았지만 이를 믿지는 않았다. 그저 더 큰 표적들을 요구할 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더 이상의 표적을 보이지 않겠다고 그들에게 선언하시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 하나의 표적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사흘만에 무덤에서 일어나겠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표적은 일어나게 된다.
 
> 사도 요한은 이어서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니고데모를 통하여 성령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거듭남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시간의 중심점이자 시작 포인트는 바로 이 골고다라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예수님의 그 목소리를 말이다. 그의 영적인 여정은 바로 이곳에서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진실을 보게 된다.  
 
>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완성하려 했다. 이 말은 말씀을 모두 마치셨다는 그런 뜻이 되기도 한다. 충분히 말씀하셨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무엇을 말씀하셨던 것일까? 그는 생명의 빛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한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의 성령을 부어줄터이니 함께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리 당부하신다.
 
>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게 된다. 요한은 니고데모를 통해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거듭 태어난단 말인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과연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일까? 분명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 요한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보게 된 예수를 증거하고자 했다.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것이라든지, 오병이어에 대한 것이라든지, 심지어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말이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보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그런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다섯남편이 있었지만 여전히 남편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던 진정한 마지막 남편은 바로 메시야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라고 답하신다.    
 
> 쩌면 그는 그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예수님에 대해 기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료를 모으고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그 기록을 완성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요한복음을 기술했다고 본다. 요한복음에 기술된 모든 이야기들의 배치와 그 중심을 관통하는 논리가 너무나도 놀랍도록 정교하고 확연하다는 것이다. 요한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 매우 익숙한 자라는 그런 생각이 든다. 
 
> 다른 복음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한의 복음서에는, 마치 영적인 장소와 현실의 장소의 그 경계를 허무는듯한 그런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과거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현실을 보는 것인지, 그것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요한의 의도이다. 기록자인 요한의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또한 그분이 사실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랬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말하려 했다는 것이다.
 
> 그는 자신이 본 예수에 대해 말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예수는 자신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주님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속에 존재하는 그 주님이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따라 여행하는 여행자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예수를 보았고, 그를 배웠고, 그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예수의 참된 증인이 되어갔던 것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그는 예수를 증거한다. 자신이 만난 그 예수를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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