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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따라서...(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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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8,959회 11-08-1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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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을 시작하려하는 자들은 하루에 세시간에서 네시간정도는 반드시 인내의 시간이라는 것을
 가지는 것이 좋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일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인내의 시간이라 함은 주된 일이 참아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일을 함에도 참아야하며 기도나 묵상을 하는 일에도 참아야 한다. 그 밖에도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참는다는 느낌으로 임해야만 한다. 물론 믿음이 있어 더나은 자세를 갖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겠으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인내의 시간을 광야에서의 40년처럼 생각해 볼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자아를 지우는 정도의 시간만을 필요로 하기때문에 보통 삼사년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할듯 싶다. 물론 개개인의 차이가 있어 십년이 지날 수도 있고 사십년이 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이 기본적인 베이스가 되므로 이것을 몸에 익히지 않고서는 다음 과정을 지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내의 시간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그렇게 참음으로써 많이 읽게 되면 성경의 대략적인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표면적인 이야기와 이면적인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때 익히게 되는 것은 오직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럴지라도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표면적인 이야기들일지라도 대부분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 기록이 되었으므로 매우 진보된 정신세계를 가진 소유자들이 아니라면 그 이야기조차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들이 그렇게 진보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갔으며 그리고 그 중에 가장 깊은 정수를 글로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배우지 못한 자들을 불러 지혜롭다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리라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불러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주시며 넘치도록 주시리라 하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어리석은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함은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만이 아니라 책망하여 이를 부끄럽게 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돌이켜 지혜를 불러 구하는 자에게 후히 넘치도록 주실 것이라 믿는다. 매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다고 생각해 보자.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해봐도 그 해결책을 찾기 힘들 때가 있다. 생각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면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여러가지 가능성있는 해결책들을 찾기도 한다. 이처럼 생각을 계속하다보면 지혜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지혜가 부족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혜의 부족함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지혜를 불러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비가 올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집에 갈 동안만을 위해 잠시만이라도 비가 멈추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해보게 된다. 우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매번 비는 빠르게 점점 줄어들어 거의 젖지 않을 정도로 줄어든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엔 베드로도 아닌데 믿음이 부족한건지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쫌만 더 쫌만 더 안돼....' 무언가 자연엔 법칙이 있는 듯하다.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고 한다. 병든 이를 위해 기도할때도 병의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이는 낫고 어떤 이는 낫지 않는다. 분명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을 뿐이다. 성경은 단지 이해하기 힘들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의 일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신다.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떠할까? 하늘엔 어떤 일이 있는 것일까? 한때 이런 일은 나와 상관이 없을 것이라 여겼었다. 과연 그러할까? 의문이 든다.
 

줄어드는 비

 
>성경을 알게 되면서 수많은 의문이 든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었다. 지혜를 얻으면 열가지를 깨닫게 되지만 백가지나 되는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그렇지만 어찌 뒤로 물러서겠는가? 이것이 그 좁은 길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하물며 이면적인 이야기는 어떠하겠는가? 오직 성령의 감동만이 이 이면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이다. 반석이라는 이름의 베드로는 표면적인 이야기로는 수제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면적인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말한다. '내아들아! 나도 안다.' 무얼 안다는 것일까? 야곱은 요셉이 꾼 꿈을 듣고 마음에 두었다. 요셉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말한다. ' 내 아들이 짐승에게 찢겼도다. 정령 그리되었도다.' 분명 야곱은 무언가를 알고 있으며 또한 숨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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