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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을 따라...(세번째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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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7,985회 10-05-0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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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했다면 이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지옥의 실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정말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반면 천국의 실재는 사람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정말 무지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가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절대악과 절대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 흔히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들린 놋뱀을 바라봄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린아이를 꼬드기는 달콤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구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자. 구원이라 함은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을 그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물에서 재미있게 수영하는 이를 강제로 끌어낸다면 이를 구원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도움을 바라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구원이란 그 대상이 정확하게 무언가를 간절히 필요하게 될 때에 발생하게 되는 그 어떤 것이라 하겠다.
 

부자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 이를 쉽게 생각해보면 굉장히 우스운 이야기가 된다. 부자는 절대로 천국 못간다. 당연하다. 부자가 뭐가 부족해서 구원을 바라겠는가? 거지도 천국 못간다. 거지가 원하는 구원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지가 부자가 된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다. 그러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 천재는 천국 못간다. 천재는 천재성을 발휘하느라 바빠서 구원의 필요성을 못느낀다. 바보는 머리가 나빠서 열심히 공부하느라 천국 못간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께 듣고 배운 자가 아니면 그 필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는 자신이 죄 아래에서 났고 죄의 종으로 그렇게 전락해 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막무가내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구원을 강요하는 자들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자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기 세력을 넓히려 하는 것이며, 스스로가 왕이 되려하는 거짓 선지자들인 것이다. 
 
 
>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에겐 죄의 정죄로부터의 해방이 정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아담은 선악과를 통해 놀라운 지혜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원치 않는 죄를 행하게 될 뿐이었다. 선악을 알게하는 지혜는 좋은 것이었으나 이를 행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결국 율법 아래에서 죄의 종으로 그렇게 전락해 버리고 만다.
 
> 구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내버려 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인생을 나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 없이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그것을 망치려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또한 그들의 불행을 엿보다가 그것을 기회로 삼아 접근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의 복인 것이며, 우연히 닥친 불행도 하나님께서 연단을 위해 허락하신 것이니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시 그들의 자유가 부럽거든 세상에 뛰어나가서 그들과 함께 경쟁해보면 될 것이 아닌가.
 
 

 

 
>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오히려 교회로 들어오게 된디.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교회 가운데서 또다른 세상을 만들고 그 경쟁을 시작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믿는 자들이 모인 곳이 되어야만 한다. 믿지 않는 자들을 믿게 만드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종의 학교와 같은데 왜 다시 그 학교에서 그들을 빼내려 한단 말인가? 이 시대가 어두워 진리를 찾는 자들이 없다고 해서 과연 망하겠는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세상의 빛이요, 맛을 내는 소금이다. 맛을 잃은 소금이 무에 쓸데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어둠 가운데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단지 빛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 사실은 세상 사람들은 무르익어가는 곡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슬픔을 배우고 사랑을 갈구하며 의를 찾고 악을 배우며 시기와 질투로 인해 망가져가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곡식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은 살만하고 또 즐겁다. 욕심을 뿌리치기엔 그 달콤함이 너무 유혹적인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어찌 뒤로 물러서겠는가? 물러서려 한다한들 무엇을 위하여 그리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찌 알겠는가? 아버지께서 택한 자들에겐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마다 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심과 같으리라.
 
> 구원이란 이처럼 준비된 자가 아니면 그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무거움이 담겨있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자가 아니면 나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제일 처음 요구 받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던지 상관없이 그 삶을 끝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쉽고 또 어떤 이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혹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뱉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무거운 의미를 쉽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자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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