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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나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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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8,359회 11-01-24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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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선과 악을 나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이란 말인가? 악의 편에서 보면 선이 악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마치 어둠에 익숙한 생물이 빛을 보면 빛이 어둠과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자가 새끼 양을 죽이면 이것을 악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죄다. 또한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은 살인이라 하지 않는다. 이런 미묘한 차이는 무엇일까? 선과 악을 구분짓는 이 미묘한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라고 할 수 있다.
 
> 죄라는 것은 법에 의해 정의되어진다.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법은 율법이다. 율법의 중심엔 십계명이 있다.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은 율법의 총체적인 모습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 한다. 예수께서도 이를 옳다 여기시고 이를 깨달은 자에게 천국이 멀지 아니하다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란다. 다시말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치 않으면 그또한 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저 죄인이라 하신다.
 
 
 
> 일반적인 법은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종교적인 일면을 반영했겠지만 시대가 변해가면서 자리잡은 법이란 결코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일반적인 법은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공익의 이익을 침해할 때를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는 선과 악이란 개념이 없다. 다시말해 선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치 않았기에 법 집행을 받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이권을 침해했기에 그에 응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룰 수 있다. 이는 마치 성경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제론 매우 다르다. 선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 공공의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법 아래 있는 죄

 
> 또한 개인의 이권이 공공의 이권을 침해한다면 이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이쯤되면 일반적인 법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선악간의 기준을 가지고 법을 보려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왜냐하면 선악에 대한 개념은 법과는 다른 매우 먼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법은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선을 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각 나라의 법은 어떤 이들의 목적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때문에 법을 연구하는 것은 그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이란 선악을 가장한 강력한 권력의 상징과도 같다.
 
>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선을 행하자는 데에 있다. 율법은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한다. 또한 선을 강요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그에 응한 대가를 치루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악이 누군가에게 어떤 결과로 다가오는지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하지만 사람은 의문을 품는다. 왜 선을 행해야만 하는가? 왜 이기적인 삶을 살면 안되는 것일까? 경쟁을 통해 위로 올라가야 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의문에 이어 속이고 짓밟으며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왜 그토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알도록 강요하셨던 것일까? 혹시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영생이라 한다.
 
> 율법이 부족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다. 율법 자체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께서 오셔야만 이 율법은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을 강요하셨던 것은 정말로 우리에게 이 선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생이라는 것이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하다 한다. 모든 것들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영생을 비밀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개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할까 염려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다시 영생의 비밀을 거론하시고, 예수께서는 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하리라 말씀하셨겠는가?
 
때문에 이것은 비밀이다. 비밀이란 비밀이라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에 비로소 풀어지기 시작한다. 뭇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한 삶이 대단한 것인양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스스로를 과시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모래탑마냥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까봐 두려움에 싸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근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꽃은 시들고 풀은 마르지 않는가? 인생은 그렇게 피어나고 그렇게 지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피어났을지라도 영원히 붙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생의 비밀을 풀지 못하는 자는 그렇게 지는 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나누며 선한 양심이 보여주는 길을 찾는 것은 양육의 말씀의 그 시작과 같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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