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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네번째 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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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1,879회 23-05-12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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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는 배필 

네번째 간음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 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통해 간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과연 간음이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간음이란 일종의 배반을 가리킨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행위가 간음인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성령을 배반하고 육체가 된 것이 바로 간음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사람은 결혼을 통해 소통을 이루게 되며 둘이 하나가 되는 그런 마법과도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결혼을 통해 매우 강력한 어떤 결속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이 결속을 깨뜨리는 행위가 바로 간음이다.
 
> 이는 단순히 성적인 타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잘보면 예수께서는 저 간음이 행위가 아닌 마음에 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오른눈과 오른손을 가차없이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행의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게 되면 이또한 간음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신다. 결혼을 통해 이루는 이 결속이 결국 영적인 여정으로 그렇게 이어지기에 우리는 이 결속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수를 믿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상 죽게 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하여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모든 관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통해 이어진 이 결속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선택에 의해 이어질 수도 끊어질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미 상위적인 단계에 이르렀기에 결혼에 대한 결속은 조금은 퇴색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예수를 인하여 형제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아내와 자녀마저 버린다면 오히려 더욱 큰 보상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정말로 그들을 버린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저 육체로부터 기인하는 삶을 마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새로운 영적인 존재로서 그렇게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결속은 아내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렇게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간음이란 여전히 이 결속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 히브리서 6장 중에서... )  
 
 
> 수로 말미암아 매우 어렵게 이룬 죄사함과 성령의 인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의 기회를 허락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은 이 모든 은혜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며,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간음의 진짜 모습은 결국 우리의 마음 속에 그렇게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여자를 보고 마음으로 단지 음욕만을 품었을지라도 이는 마음으로 이미 상대를 배반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 사단의 유혹은 매우 달콤한 것으로 그렇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여든 아들이여든 하면서 그는 우리에게 말한다. 먹을 것을 위하여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라고 말이다. 또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믿는다면 그 어떤 위험이라도 그렇게 감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리 말한다. 그리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이것들을 다 주겠다며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는 것이다. 이 시험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돈과 권력,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런 강력한 왕이 되려는 마음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 이러한 마음이 결국 사단에게 절하고 경배하게 만든다. 믿음은 육체를 좆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영을 좆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은 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도 같은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이런 영적인 길을 포기한다는 것이며, 육체를 좆아 악에 빠진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육을 좆거나 영을 좆게 된다. 육신을 좆는 이는 육신의 생각을, 영을 좆는 이는 영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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