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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살겠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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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2,968회 22-01-12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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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 요한 복음 14장 중에서... ) 
 
 
 > 겠는가?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말이다. 또한 알겠는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알겠는가? 예수께서 우리 안에 있음을 말이다.
 만약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이 비밀은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풀어야만 하는 비밀인 것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해 이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며
 이 비밀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사실은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라 한다.
 
>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나뉘어 존재한다는 그런 말인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존재이기에 이런 일이 실제 가능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별개의 존재로 표현 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들의 영과 아버지의 영이 하나의 성령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한 분이라 하시며 자신을 우리라 표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 만약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는 그 예수님은 사실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지 않은가? 그저 아버지의 뜻대로 말하고 행하셨던 예수님이라는 그런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 맞을까? 사실은 아버지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말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심을 믿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이라 볼 수 있다.
 
 
"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 요한 복음 15장 중에서... ) 
 
 
> 제 두번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예수 안에 거하는 법이다. 예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예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바로 성령이었다. 우리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성령인 것이며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 또한 성령인 것이다.
 
> 그러나 아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의 옛자아는 십자가에서 죽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는 그 주권을 잃어버리게 되며 예수께서 친히 이 주권을 행사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 안에서 실제 살아있는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이다. 우리가 몸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도 혹은 산 자가 되어도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이는 죽음의 개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에 난 상처는 눈에 보여 알기 쉽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 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을 그저 피해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은 우리의 옛자아의 죽음을 그 전제로 한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처럼 옛자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영적인 존재로 결코 거듭나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거듭나게 되며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일들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더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보며 그를 만난다. 이는 그저 인식의 차이인 것이다. 
 
> 우리는 우리의 몸 안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한다. 원치 않는 죄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인지 더이상 확신 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저 우울증에 빠져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죄의 소원은 우리 안에 있다.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다가와 요구하게 되며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 힘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우리 안에서 말이다.
 
>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죄의 종이 되느니 차라리 의의 종이 되겠다는 그런 의지에 가깝다. 어차피 힘을 잃어 자신의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을 의에게 드려 의의 종이 되려 함인 것이다. 그러나 의의 종이 되면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아인 것이다. 힘을 잃었었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금 힘을 얻게 되며 진정으로 원하는 자신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인식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인식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내용인 것이다. 너희가 살겠음이라고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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