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배필 (세번째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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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1,889회 23-04-29 12:39본문
돕는 배필
세번째 결혼
> 성령의 감동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통이란 우리의 심비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그 과정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안에서 그렇게 자라나는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났으니 우리는 또한 영인 것이다.
그러나 육으로 난 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의 방법과 그 유전으로는 결코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는 것이다.
> 이 시대의 교회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교회를 이루려 했다. 신학을 하거나 목사 안수와 같은 그런 의식들을 통하여 교회들을 양산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육을 좆는 것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교회는 반드시 그 터가 필요하다. 베드로와 같은 반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그저 설교를 하며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치유하는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보냄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종은 이 소통의 중심에 선 자이며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자신이 직접 교회의 터가 되어 믿음의 집을 세울 수 있도록 본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반드시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야만 하며 그렇게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야만 한다. 그래야만 자신만의 믿음의 집을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 거듭남은 그저 믿음의 시작일뿐 그 완성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하여 반드시 아름다운 영적인 열매들을 그렇게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 소통이란 사실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그저 대화를 한다고 해서 소통을 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오랜시간 같은 공간에서 삶을 공유한다고 해서 절로 소통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소통이란 그렇게 쉬운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순간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여러 생각들을 공감하게 되기도 한다.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통이란 그런 마법 따위가 아니라 매우 발전되고 배우기 어려운 그런 상위적인 기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상대의 감정을 자기 안에서 느끼게 되고 상대의 생각을 자기 안에서 공감하게 되는 현상은 일종의 공명과도 같은 현상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은 일종의 공명을 일으키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 안에서 느끼게 되고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그의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십자가 앞에 서서 자신의 모든 죄의 짐을 내려놓고 죄사함을 얻게 되기도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인식 세계 속에서 그렇게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죄사함을 받게 되며 예수의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되며 우리 안에서 죽음과 부활과 영생의 비밀을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이 물리적인 세상이 아닌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인식 세계라는 환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창조를 받았기 때문이다.
> 결혼이란 이 소통의 중심에 있다. 남자와 여자는 육체에 기반을 둔 성관계를 통해 오히려 공감을 배우며 영적인 소통의 그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사랑을 배우게 되며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만약 여자가 남자보다 정말로 하찮고 미약한 그런 존재였더라면 어쩌면 소통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자가 만약 더욱 아름답고 복잡한 그런 상위적인 존재인 것이라면 소통은 어쩌면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 그러므로 처음부터 돕는 배필의 진짜 역할은 소통이 무엇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려는 것에 있다. 남자는 성관계를 통하여 여자라는 존재에 그렇게 다가가려 하며 그 공감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여자에게 다가가려 하면 할 수록 오히려 더욱 이해하기 힘든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곤 한다. 왜냐하면 소통이란 사실 매우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진실에 매우 민감하다. 반면 남자는 이 세상의 구조에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여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요소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 반면 남자는 새로운 기술이나 원리,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그런 힘의 구조들과 같은 것들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된다. 남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반면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을 보기 위하여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정반대를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닿기를 바라며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혼이라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인 것이다.
> 사람은 결국 영적인 길을 걷거나 육체의 길을 걷게 된다. 여성을 단지 육체의 소욕을 푸는 그런 도구로써 생각하는 자는 그저 육체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여성을 사랑의 대상으로써 그렇게 인식하고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한다면 소통이라는 이 상위적인 기술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인 여정의 끝엔 성령께서 계신다. 성경은 예수께서 신랑이라 하고 몸된 교회를 그의 신부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은 일종의 공명이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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