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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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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3,011회 22-01-3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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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은 네피림이라는 막강한 카드를 가지고 첫번째 세상을 그렇게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그 결과 성령께서 더이상 함께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은 겨우 일백 이십년정도로 줄어들었지만, 그들은 번성하였고 빠르게 그 땅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노아는 두번째 세상의 첫사람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가나안을 저주하고 셈을 축복한다. 왜일까? 단지 함의 어리석음을 탓하기 위하여 그 아들인 가나안을 그렇게 저주했단 말인가?
 
 
"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   
 ( 창세기 22장 중에서... )   
 
 
> 간이 지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다.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또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이 번제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인하여 대적의 문을 얻게 되리라 하신다. 이는 분명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예수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그런 예언인 것이다.
 
>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무엇을 행했단 말인가? 무엇을 하였기에 이처럼 엄청난 결과가 따른단 말인가?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선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은 그 대적의 문을 얻게 할 것이라 한다. 대적의 문이란 일종의 성문을 가리킨다. 전쟁 중에 그 대적의 성문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은 그렇게 침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는 그런 말이다. 그리고 그 대적은 바로 사단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대적의 문을 얻게 한단 말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은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번제로 드리려 했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가 생각이 없어 이 일을 행하려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도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는 것이 가하지 않다하던 바로 그인 것이다. 그런 그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아무런 주장도 없이 이같이 하였겠는가? 자신의 독자를 떠나 이는 어린 아이의 인신 공양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이지 않는가? 여기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본다.
 
 
 
 
> 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가나안에 대한 문제를 듣게 된다. 사단이 함을 통해 가나안을 낳았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노아의 아내가 낳은 함의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람에게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영원히 그들을 떠나셨기에 더이상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미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려 하는 것에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여 천사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 때문에 두번째 세상에는 반드시 성령의 강림이 필요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이라는 카드를 준비하시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서 그 의인의 피를 흘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엔 커다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사람에게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또다시 성령을 배반하고 타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단의 간교한 말에 넘어가 언제든지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가나안을 저주하게 하고 셈을 축복하게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끄시며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욱 신뢰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제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의 그 초석이 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독자인 이삭을 그 번제로 드리라 하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였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한다.
 
> 사단의 시험에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씀하시던 예수님처럼 그는 하나님을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에 어찌 이삭을 향한 사랑이 적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 어찌 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의 시험을 잘 이겨내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또한 성령의 강림이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아픈 자가 스스로를 치료하려 하지도 않고, 무조껀 기도를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이해하는 범주 내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해를 벗어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이해를 벗어나는 무언가를 요구받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배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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