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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령 ( 첫번째 복의 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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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3,713회 21-04-2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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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령  

첫번째 복의 근원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 요한 복음 16장 중에서... ) 
 
 
 > 수께서는 자신이 떠나야만 비로소 성령께서 오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것은 사실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던가? 그가 죽음으로써 이루시고자 했던 그 모든 일들의 끝에는 바로 이 진리의 성령이 계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 진리의 성령이 누구인지 말이다. 첫번째 세상이 멸망당하기 전에 성령께서는 이미 사람들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 육체를 좇게 되자 성령께서는 이로 인하여 사람을 영원히 떠나시게 된다.
 
> 성령께서 그렇게 떠나신 후에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아를 통해 세상은 다시금 시작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여전히 사람과는 함께하지 않으신다. 사단은 세상 임금이 되었고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간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지만 육체로는 악을 원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의 종이 되었고 마음으로는 그 정죄를 받아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또한 그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의로 여기셨다. 그리고 나이 많아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또한 그렇게 얻은 아들마저 번제로 드리라 하였으나 그는 이 또한 순종하여 시행하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 한 것일까? 또한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 번째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상황과 상관 없이 이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이 믿음의 결과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마치 광신도를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한가 말이다. 이단에 빠진 어리석은 광신도들의 그 맹목적인 믿음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매우 비슷해 보일뿐 분명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이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 첫 번째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심은 성령의 인치심을 의미한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마음 가죽을 벗겨내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는 성령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복의 근원은 성전을 의미하며 성전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 번째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는 자들이 진정한 약속의 자녀인 것이며 그저 육체를 따라난 자는 이스마엘처럼 종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약속이 없으니 결코 성령은 받지 못할 것이다.
 
> 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복의 근원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첫번째 세상에서 떠나신 성령을 다시금 사람들에게 보내 주시겠다 하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미 이루셨다.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를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언약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도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도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도 바로 이 성령이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다. 마치 맹신처럼 보이는 이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맹신과도 같은 이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 이는 첫번째 세상에 그 답이 있다.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신을 좇아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진리의 영을 따라 지혜를 배우고 의에 거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 중 누군가에 의해 그들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
 
> 그들 입장에서는 이 천사가 하나님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혼란스러웠고 이를 판단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이 이같이 속히 떠나 육체가 됨을 보았고 이로 인하여 크게 실망하게 된다. 노아 때에 가나안이 태어나자 사단이 행한 일을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신다. 그리고 그 대책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바로 이 믿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 대책이 되는 것일까?
 
 
 
 
> 먼저 믿음이란 성령의 가르치심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믿음이란 성령의 인치심을 그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성령의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희생을 통해 이루신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은 그저 맹신에 불과한 무언가가 될 뿐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영적인 개념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시며 명하여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때에 우리는 반드시 이를 믿어야만 한다.
 
> 영적인 개념들은 물리적 세계의 규칙들을 크게 흔들 수 있으며 상위적인 권능으로 이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렇게 상위적인 영적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영적인 세계를 스스로 보고 들을 수 있게 된다면 이 믿음이라는 방식이 매우 방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는 사단의 간섭을 철저히 배제하도록 착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단은 철저히 논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며 모든 것들을 그렇게 의심하도록 유도한다. 사단의 정죄란 결국은 그 자신을 의심하게 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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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있어 믿음은 마치 방패처럼 사용되어졌다고 생각한다. 사단의 증거는 끊임없이 나를 흔들고 괴롭게 했지만 나는 그저 이를 무시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그렇게 나아가야만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선택에 대한 그 책임을 그저 회피하고자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치심은 모든 것들의 진실을 보게 하셨고 하나님의 숨겨진 생각들을 깨닫도록 이끄셨다. 믿음을 통해 의를 값없이 얻었으나 그 의를 배우고 깨닫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성령의 진짜 이름은 진리일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갑자기 진리의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은 바로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됨으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며 진리를 알게 됨으로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이 길을 가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그만큼 어리석기 때문이 아닐까? 방패로 우리 몸 전체를 가리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고 고집스럽게 가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어리석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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