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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할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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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64회 25-07-02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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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할례인가?
 

 

"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 나님께서는 정말 '열국의 아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맞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다.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언약의 표징이라면서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시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 놀랍게도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이 할례를 행하고 있다. 그 이유도 모른채 말이다. 사실 이 언약의 실체는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 

 
 

>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오른다.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는 것이다. 이삭은 이상함을 느꼈던 것인지 아버지께 묻게 된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마침내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잘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광신도마냥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정말로 그걸 그에게 요구하신 것이 맞다고 하신다. 

 

> 그러더니 그 말도 안되는 요구를 정말로 해냈다고 아예 대놓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게 된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는가? 납득할 수 있냐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이는 정말 이상한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그런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던 것일까? 과연 무엇을 위하여 말이다. 잘보면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것이다.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으리라 하신다. 또한 그 씨가 대적의 문을 얻는다?

 
> 잘보면 이는 비유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를 해석하자면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다? 하늘의 별은 천사들을, 바닷가의 모래는 사람들을 말한다. 씨라 하였으니 천사들도 그의 후손이 되며 사람들도 그의 후손이 된다. 또한 그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하였으니, 예수께서 대적인 사단을 무력화시키는 어떤 일을 행하시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겠는가? 이는 매우 복잡한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이러하다. 첫번째 세상이 있었다. 그들은 물로 멸망당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되었기에 성령께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람의 딸들을 취하였고 네피림을 낳고자 한다. 할례의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할례는 더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영의 소욕을 따르겠다는 그런 상징적 행위인 것이다. 왜 할례겠는가? 언약의 표징이 왜 할례여야만 하겠는가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떠나가신 성령을 다시금 되돌리는 것이 그 목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대안책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안책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한다. 또한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 그를 축복한다. 그는 샬렘왕 멜기세덱으로 가장하여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아와 그를 축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를 잇겠다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그 말도 안되는 믿음 말이다.   
 
> 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론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중요해진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뜻대로 준행하려 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처럼 아버지를 믿었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된다. 자신의 판단보다 아버지의 판단을 더욱 신뢰했던 것이다. 마치 이삭처럼 말이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인지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 '열국의 아비'는 육에 속한 그의 후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잇는 영적인 자녀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시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에 한해 죄사함과 성령을 부어주시게 된다. 예수로 말미암아 비로소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영적인 방패와도 같다. 사단의 유혹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안전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할례는 상징적인 거세와도 같다.
 
> 더이상 육체의 소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표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이상 육체의 할례를 행할 필요는 없다. 만약 누구라도 할례를 행하고자 한다면 할례의 진짜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할례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영적할례는 육체에 바탕을 둔 옛자아의 죽음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보여야 할 언약의 표징이 인내와 고통으로 그렇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과연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 옛자아가 죽지 않으면 어찌 영의 새로운 자아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보여야 할 언약의 표징은 우리의 옛자아의 죽음이라 하겠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를 그렇게 바라보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그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삶이 끝나고 영에 속한 삶이 다시 시작되리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겠지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면 살지 않겠는가? 바로 이것이 영적할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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