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4) 혼인 잔치와 슬기있는 다섯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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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145회 22-06-26 12:59본문
천국은 마치(4)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믿음을 주께 인정받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이라 한 바리새인들과 심지어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는 누구보다도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고 인정해주시는 믿음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믿음이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두 가지 비유는 모두 그들이 여태껏 하나님의 종들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첫 번째로는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 하신다.
천대받는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저들이 믿지 않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뉘우쳐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이 받으리라 하신다.
저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긴 이유는 결국 저들이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믿음이란 곧 결과물인 열매를 맺어야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이 믿음이 열매를 맺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비유로 대답하신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청하나 그들은 오기를 싫어하고 종들을 잡아 죽인다. 이에 임금은 이들이 잔치에 합당치 않다 생각하고 길에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청하라 명한다. 그러나 그렇게 청하여 온 자들 또한 모두가 합당한 자들은 아니었다. 혼인 잔치에 예복도 입지 않고 들어온 것이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하신다.
이 비유는 앞선 비유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청함 받은 자는 많다. 첫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을 것이고, 두 번째 길에 있던 자들은 앞서 얘기한 세리와 창기들일 수도 혹은 이방인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합당하지는 않다. 자격이 필요한 것이다.
예복을 갖추지 않은 자가 유구무언인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예복을 갖출만한 사정이 안 된 것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인가 혹은 갖추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몰라 당혹스러워하며 부끄러워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갑작스레 받은 초대에 그런 것까지도 갖추어야 하나 불만을 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쪽이든 이는 자격이 없는 자라고 판단되어 진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아계실 때 제자들이 나아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보이실 징조에 대해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의 재난과 환난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시고 이를 경계하라 하시며 또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챙겼음에도 그에 필요한 기름은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듯하다.
이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혼인 잔치에 예복을 갖추지 못한 자는 분명 동일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어찌보면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하고 이를 가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들은 그저 무지해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 일에 관심도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마땅히 자기가 갖추어야 할 지식임에도 말이다. 이처럼 이들은 얼핏 보기에는 슬기있는 다섯 처녀들과도 택함 입은 자들과도 처음에는 유사한 모습을 두른듯 보일수 있으나 사실 그 사이에는 정반대 되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나 또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데려감을 당한 자는 깨어있는 자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깨어있으며 예비하고 있으라 강조하신다 어느 날에 주가 임할지 모르므로 말이다.
멀뚱히 하나님을 믿으며 마지막 날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는 결국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게 될 뿐이고 기름을 제때 얻지 못해 밖에서 부르짖게 될 뿐인 것이다.
한 중풍 병자를 낫게 하고자 네 사람이 메어왔다. 헌데 무리가 많아 예수님을 뵐 수 없게 되자 네 사람은 그 계신 곳에 지붕을 뜯어 침상째로 달아 내린다. 어찌보면 굉장히 민폐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하사 그를 낫게 하신다. 이를 보면 예수님께서 중요히 여기시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저들은 가만히 예수님께서 움직이시거나 무리들이 흩어지는 것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치심을 받고자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들은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행했다. 예수님께 간구한 백부장도 한 가나안 여자 또한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믿음이 크다 인정받는다.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그 열매 또한 알아볼 수 없다 생각되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과실은 그의 말과 행동 또한 예복과 기름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을 정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이 그리 높으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도 알 수 없지 않겠는가? 이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혜 말이다.
세상의 끝 날, 마지막의 마지막에 비로소 갖춰야 할 그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열매 없는 믿음이란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 주께 인정받지 못한 믿음이란 결국 개인의 아집에 불과할지 모른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울며 부르짖으며 나는 평생 당신을 위해 일했노라고 내 모든 삶을 그를 위해 살았다고 해봤자 그의 비뚤어진 믿음은 외면당한 채 버림받을 뿐이다. 괜히 사이비란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정말 신실하게 믿는다 주장하여도 마찬가지이다. 한때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 청년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할지 몰라도 주께서 요구하시는 결과,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저 그렇게 때 되어 아무런 가치 없이 생을 마감할 뿐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그분을 닮고 가까워지며 배우기를 원하시는 듯하다. 또한 깨어있으며 예비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남기셨다.
또한 이 모든 천지만물과 이치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다. 무엇이 지혜인지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말이다.
따라서 나도 주의 말씀을 이해하고 배워나가기 위해 힘쓴다. 언젠가 주의 모습을 닮을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며 있는 모든 일들을 그저 흘려넘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이끄시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그 답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께 나아갈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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