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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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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300회 24-09-1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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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겠다는 베드로에게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비난의 어조도 그렇다고 경고처럼도 보이지 않는 저 담담한 단언은 흡사 저주와도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확정 짓는, 이는 과연 예언인가? 그렇다면 이를 베드로에게 말씀하심은 대체 무얼 위함이며,

이를 들은 베드로는 과연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는 사건들이 있곤 한다.

누가의 말에 따르면 놀랍게도 사단은 마치 5분 대기조처럼 옆에 딱 붙어서 이들을 시험에 들게 예수님께 청구해 왔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이라 말씀하시기도 한다.

과연 예수님께서 어떤 시험들을 겪으셨단 말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일까? 사랑하는 아들이라 인정까지 받았는데 말이다. 예수님을 시험할 자는 결국 사단밖에 없지 않은가. 

 

유다에게는 사단이 충동질을 했고 예수님이 떠나가기를 원치 않는 베드로에게는 사단아 물러가라 하셨다.

그렇다 사단은 알게 모르게 계속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에게 전례 없는 사건이었을 테니 필시 주목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사단이 계속해서 시험하려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단순한 가능성에서 나온 예언이 아니라 그런 사단의 계략이라면 어떨까?


사단의 개입을 가정하에 사건을 다시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들이 해소된다.

첫째로 ‘누가 닭을 울게 했느냐’ 라는 것이다. 당연히 말씀하신 예수님 혹은 하나님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예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베드로에게 죄책감을 심어놓을 필요성도 없고, 평소 예수님의 방식이라 보기에도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죄책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하는 이 방식은 기실 사단이 가장 애용하는 수법이지 않은가.


또한 일견 차가워 보였던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이 말씀은 비난도 저주도 예언도 아닌 사단이 청구한 시험의 내용이 되는 것이고,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베드로가 고백한 말로 인해 그를 믿어주시고 또한 이를 통과하길 바라시며 컨닝페이퍼를 넘겨주신 것이 되는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렇다면 한번 해 보아라 하고 말이다.


베드로는 결국 시험에 통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단순히 베드로도 무력하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결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가 그 뒤로 행한 사도로 불린 그 행적들은 빛 보지도 못한 채 저버린 생명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믿음 없는 자의 관점에 불과하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육체의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의 믿음을 증명하고 이겨내기 힘든 시험을 통과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겠는가. 어쩌면 예수님의 옆에서 같이 못 박힌 것이 강도가 아닌 베드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어쩌면 베드로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까지도 함께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베드로가 그 이후에 한 일들이 과연 이것보다 가치있다 할 수 있을까? 무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참예하는 일인데 말이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상하다 여긴 적 없는가?

한편 강도의 죽기 직전의 몇 마디 말로 예수님께서 저렇게까지 말씀을 해주신다는 것이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열정 어린 고백을 믿어주셨다.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베드로 대신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한 그 이후에 시험을 겪을 모든 자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으셨다. 올바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되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한낱 행악자인 강도의 말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것이다. 이는 원래 베드로가 들었어야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정해진 미래란 없다.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결코 불가능은 아닌 것이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시험은 아니었지만 베드로 또한 시험을 당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다행히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의 실패만으로 우리의 가능성을 저버리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베드로가 시험을 통과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가능성이 모두 끝났다는 것 또한 아니다. 그에게는 어려운 시험이기도 했고 이는 예수님께서도 아시는 바 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패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면 어떠하겠는가. 물론 모든 실패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패를 통해 더욱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더 큰 발돋움을 할 디딤돌이 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번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극히 어려울 뿐,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당연히 없지 않을까. 실패는 결국 실패일뿐 결코 성공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반복되는 실패라면 더 배울 것도 얻을 것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매일같이 수많은 실수들과 잘못된 선택들을 한다. 이로인해 나 자신이 매우 하잘것없고 불안정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지 두려워진다. 언제고 이 모든 실패들이 쌓여 내게 남겨진 기회가 끝이 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결국에는 나의 선택만이 남는다. 내가 이룬 결과물만이 나를 증명한다.

때문에 하루빨리 성장하여 탈피하려 애쓴다.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더욱 깊이 생각하며 실패를 마음에 새기고 겸비하여 다음에는 반드시 통과해낸다는 결과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께서 내게 원하시는 성장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언젠가 나의 말과 마음과 행동과 선택이 일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기에 합당한 자라고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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