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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꿈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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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42회 25-03-2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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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꿈을 꾸고 그로 인하여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왕이 그 꿈을 자기에게 고하게 하려고 명하여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매.....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나로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느부갓네살왕은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된다. 이 범상치 않은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직감했는지 느부갓네살왕은 이 꿈으로 인하여 심히 번민하게 되었고 결국 이 꿈의 해석을 알아내고자 한다.
그렇게 각종 박사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에게 꿈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그 꿈의 내용마저도 내게 보이라 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니 그 누구에게도 이는 가능해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신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말에 느부갓네살왕은 심히 분노한다. 그리고는 바벨론 모든 박사를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갑자기 느부갓네살왕은 왜 이리도 격분했단 말인가. 그는 그들이 그저 세월에 기대어 꾸며낸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무능력함에 환멸을 느끼는 듯도 하다. 하지만 그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란 말인가. 언제는 그들이 그러한지 몰랐던가. 그럼에도 느부갓네살왕은 그들의 능력밖의 일을 요구한다. 어쩌면 이번 기회를 빌어 평소 거슬리던 저들을 치워버리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는 다니엘이 있었다. 그는 이를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문제가 되는 꿈을 주께로부터 받게 되었으며 이를 해석해내기까지 한다. 이 사건을 통해 다니엘은 왕 앞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신 것일까. 단지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이며 꿈을 해석할 줄도 알 만큼 명석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왕에게 그 꿈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만이 목적이셨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 꿈의 해석은 사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다니엘은 이 꿈에 대해 주께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한다.
그런데 꿈의 해석을 보자면 실제로 이 일은 느부갓네살왕의 시대에 일어났다고 보기에도 힘들고 무언가 막연하며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마치 해석이 아니라 또 다른 비유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이 해석이 확실하다 왕 앞에서 공인한다. 되려 그런 말이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는 건 지나친 억측일까? 확신에 찬 그 말이 다니엘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다른 가능성을 부러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나라가 나뉘고 인종들이 서로 섞여 합하지 아니할 때 서게 되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하나님의 나라. 이는 오히려 먼 미래에 있을 계시록의 예언에 때에 근접한 이야기같이도 들린다. 사실 어쩌면 그 꿈 자체가 왕이 아닌 다니엘에게 전한 메시지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다니엘의 해석에 느부갓네살왕은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는다. 꿈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한들 해석이 틀릴 가능성은 추어도 생각하지 않는 건가. 다른 박사들에게는 그렇게도 의심 많던 자가 말이다.
그는 꿈의 내용을 말한다면 그 해석도 분명 맞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어떻게 보면 부자연스러워 보였던 느부갓네살왕의 이 모습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상정하에 다시 그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마치 계속해서 꿈이라는 문제를 알아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는가. 분명 이 사건 속에는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더 있는듯 하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이 있다 한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이것들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더 쉬운 수준의 비유들을 제시하심으로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에 도움을 주려 하신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해석하는 능력만 가진들 저 감추인 것들을 풀어내는 것이 정말 가능해 질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깨달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옛것과 새것을 말씀하신다.
옛것은 분명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새것은 그 짝이 되는 해석이 되지 않겠는가.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건 느부갓네살왕의 사건과도 같이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담긴 것들을 의미한다. 그 메세지를 알아내는 것이 곧 해석이요. 그를 이루면 께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옛것은 느부갓네살왕의 꿈과 같은 문제를 말함이요, 새것은 다니엘의 그 해석을 뜻하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이 옛것이 되며 그 해석이 새것이 된다. 예수님의 비유도 옛것이고 그 해석은 새것인 것이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선 사건에도 보여주었듯이 사실 첫 번째 단계부터가 녹록지 않다.
우리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조차 하지 못할 때가 태반이며 이를 찾아내는 것 또한 상당히 요원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석하는 것보다도 감추어진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더 어려울 때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왜 다른 박사들은 불가능했고 다니엘에게는 가능했던 것일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데에는 단지 지혜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느부갓네살왕의 그 꿈처럼 말이다. 다니엘이 아무리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도 주께서 허락하시지 않고서 그가 꿈을 알아내는 것이 가능했을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꿈을 다니엘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해석 또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께서는 문제 곧, 옛것을 찾아낸다는 것이 이를 해석하는 것보다도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심지어 이는 사실 사람에 뜻에 달린 것조차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꿈을 해석하는 능력은 개인에게 있을지라도 꿈을 허락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아무나 그 문제를 찾아내려 한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허락받은 이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였다. 그런 그도 꿈을 해석하는 방법은 알았을지언정 스스로 꿈을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그 꿈마저도 하나님께 허락받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것과 옛것을 모두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는 이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깨달음에 이르기에 있어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주의 허락하심을 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함을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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