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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인의 한계를 넘은 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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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드보라 댓글 0건 조회 2,768회 17-05-16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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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인의 한계를 넘은 삼손

 

 

 

 

 

나실인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일정 기간 서원하고 자신을 구별하는 나실인들은 있지만 날 때부터 나실인인 사람들은 어떨까?
세례요한은 대표적인 나실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임무를 위해 일반인들과 다르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거룩히 구별됐다.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오리라 한 엘리야'라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 또 한 명의 나실인이 있다.
이 또한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다.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세례요한의 잉태 소식을 전하였다면 '기묘'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하나님의 사자가 직접 임하여 삼손의 나실인으로서의 임무를 전한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수많은 사사가 다스리던 혼란의 시대.
이스라엘이 하나님 목전에 악을 행하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이방 민족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면 사사가 일어나 그들을 이방 민족의 압제와 학대에서 구원하고 평화가 찾아왔다.
이러한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블레셋의 손에 붙인 바 되었지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관할 아래 순응하고 현재 상황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협하며 만족하고 전쟁을 원치 않은듯하다.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 삼손을 결박하여 순순히 블레셋에게 내어준 유다 민족의 모습이 그걸 입증한다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방인들을 남겨둔 것은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심이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 세대에게 가나안 전쟁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이라고 하신다.
전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애굽에서의 그 조상들의 모습처럼 수동적이며 종속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삼손의 나실인으로서의 임무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전 사사들의 시대와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이방인들의 침략방식 또한 다르다.
당시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선 나실인을 필요로 하셨고 삼손을 예비하신다.
 
어린 삼손은 여호와께로서 복을 받으며 자란다.
청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시고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충실히 주의 감동을 따라 일을 이루어 간다.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되어 어린 사자를 찢었고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아스글론에 내려가 삼십 명을 쳐 죽였으며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이는 구원을 이루어낸다.
그렇게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로 세움을 입게 된다.
그는 다른 사사들과는 다르게 홀로 거했다.
또한 그는 홀로 싸우는 자였다.
 
삼손이 사랑한 들릴라라는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성경에선 들릴라가 아닌 그 여인을 사랑한 삼손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들릴라를 사랑한 삼손. 그의 선택은 어떤 평가를 받는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게... 그의 이 선택은 나실인으로서의 선택은 아닐 것이다.
주께서 명령하신 것이 아닌 오직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일 것이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던 것일까? 가사에서 기생에게 들어간 후 블레셋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모의하고 매복하자 그들을 죽이진 않고 성문짝과 설주 등을 어깨에 메고 꽤나 먼 거리까지 간 것은 기이한 행동으로 보인다. 왜 이런 행동을 한 걸까?
알 순 없지만 그가 무언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걸까?
 
나실인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삶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에 의해 블레셋인들에 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는 치욕을 당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여인에게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던 삼손.
마지막 그가 주께 한 부르짖음이 마음을 울린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그가 죽을 때에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수가 더 많다 한다.
그렇다면 그는 그의 나실인으로서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완벽히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그의 삶에 후회란 없다.
그러기에 멋있고도 눈물이 난다.
마지막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함께해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들의 숱한 평가보다 그의 삶을 평가하는데 중심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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