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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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2,059회 20-10-05 15:56본문
정해진 멸망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 그가 이제는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낸다. 사자를 인하여 크게 기뻐한 히스기야는 국내에 있는 그 모든 궁중 보물 그의 모든 소유를 사자에게 내보이게 된다. 그러자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히스기야 왕에게 묻는 것이다.
“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
" 그들이 먼 지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
"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
“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
그리고는 이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전한다. 날이 이르면 네 집의 소유와 네 열조가 쌓아둔 모든 것들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며 네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스기야의 대답은 실로 당황스럽다.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찐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오”
어찌 자신의 나라가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될 것이라 한 그 말씀을 그저 선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어떻게 그걸 대놓고 자신의 사는 날 동안에는 태평할 것이기에 선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보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하여도 자신으로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이 결과에 괴로워해야 함이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 말은 히스기야는 자신의 사는 날만 평안하다면 괜찮은, 이기적인 왕이란 말인 것일까?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다윗의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자였다. 그는 여호와 앞에 미움이 되는 산당을 제하고 주상을 깨트리며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화하여 분향하던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수기도 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며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저자에게는 그의 전후 유다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다고까지 평가된다.
또한 앗수르왕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침공하기 시작했을때의 그의 행동을 보자면 굉장히 흥미롭다.
히스기야는 일단 처음부터 앗수르 왕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하며 과하게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뒤로는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서는 내게 짐을 지우라 하며 앗수르왕이 무언가를 요구하기를 유도한다. 앗수르왕은 바로 돈을 요구하고 히스기야는 돈을 마련한다. 헌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금전을 마련하는 장소이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서 앗수르 왕에게 주었다.
과연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성전에 발라진 금까지 벗겨서 주었을까? 당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굉장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다. 돈이 없어서 있는 금 없는 금 긁어모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히스기야의 전략이라고 보여지며 또한 히스기야의 계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앗수르 왕은 자신이 받은 금이 어디서 난 것인지도 모른체 덥석 받아 놓고는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신하들을 보내 협박한다. 그리고서는 히스기야의 태도로 인하여 교만케 된 앗수르 왕은 그의 신하를 통하여서도 편지를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심히 모욕하고 훼방하는 말을 하게 된다. 이는 모두 히스기야의 계획했던 바 대로였다.
히스기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사야로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께서는 그 기도를 받아들이시어 그의 멸망을 약속하신다.
그 효과는 생각보다 크게 발휘되었다. 무려 하나님께서 직접 사자를 보내어 십팔만 오천을 멸하게 하시는데 이에 앗수르 왕은 그 얼굴이 뜨뜻하여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결국 죽임을 당하는 끝을 맞이하게 된다.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들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스스로 할수 있는 한의 지혜를 짜내어 주께 보였으며 하나님께서도 이를 받아주신 것으로 보여진다.
이 일의 방식도 마치 다윗이 골리앗에게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하겠다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나아간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또한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를 전하시고,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전심으로 기도하니 주께서 이에 답하시어 이적을 보여주시는데 이때 이사야의 행동과 히스기야의 말이 참 재밌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소식을 전하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히스기야를 뒤로한 채 떠난다.
이는 이사야에게도 참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그 시대에 흔치 않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왕이었으며 선지자인 이사야로서도 그런 히스기야를 기쁘게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각각 왕과 선지자로서 이상적인 관계를 이루어왔을 터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그 죽음을 말씀하시니 저로서는 이 짧은 말을 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도울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참 이러한 상황은 그에게도 괴롭고, 분위기도 절로 암담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사야는 심란한 마음으로 돌아가던 중 성읍 가운데에 이르기도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다.
이사야는 얼마나 기뻤던지 어서 히스기야에게로 돌아와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에게 하라는 말씀도 전하지 않은 채 무리에게 무화과 반죽을 종처에 놓으면 나으리라는 말을 전할 뿐이다. 이도 주께서 시키신 일인 것일까?
이는 아마 하나님께서도 히스기야의 기도를 받아들이셨으니 저도 히스기야가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더욱 그가 할 수 있는 치료법을 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사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낫게 하실 것을 안 히스기야는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실 징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나으리라 하면 낫겠거니 하면 되지 징조는 뭐하러 구하느냔 말이다.
히스기야가 낫지 않을까 두려워서 징조를 구한 것일까? 그렇다면 애초부터 이루어지기도 힘든 징조를 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하면 어떠한가? 오히려 그는 그가 여호와께서 낫게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진 것을 보이기 위해 징조를 구한 것이다.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말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의도를 알아챈 이사야는 여호와께선 징조를 주신다고도 아직 말씀하시지도 않으셨는데도 바로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징조가 임할 것인데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인지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인지를 묻는다. 자신의 의도를 알고 그리 말해준 이사야의 말에 히스기야는 더욱 이루어지기 어려운 쪽을 택하여 십도를 물러갈 것을 구하고, 이에 이사야는 그런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징조를 이루게 하시니 히스기야가 나으며 이 일이 마치게 된다. 이러한 둘의 대화는 마치 왕과 선지자 관계의 표본을 보는듯하며 참으로 서로의 의중을 알아 죽이 잘 맞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히스기야라는 왕에 대해서 살펴보자면 그는 자신의 평안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왕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며 백성들을 보호하는 참된 왕으로서의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는가.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을 전할 때에도 전혀 책망이나 비난의 색을 비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말투는 그저 사실을 전하는 것뿐이라는 듯 담담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이제 히스기야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은 다른 의미가 있음이요,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프레임을 빼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그는 왜 사자들에게 국고를 모두 보여주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일까? 이는 분명 사자들이 어떠한 말을 함으로써 히스기야가 그리 행동한 것이겠고 히스기야가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 행동 또한 잘못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대하에 따르면 그는 여호와께서 그를 낫게 하시며 이적 또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된다. 히스기야는 물론이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같이 그 교만함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므로 그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신다. 어떠한 교만이었길래 거민들 까지도 같이 교만함을 뉘우치는 것이란 말인가.
앗수르왕 사건 이후 그는 열국의 눈에 존대하게 되어 많은 이들이 예물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오며 히스기야에게 보물을 바치고 하나님께서도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시고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게 하심으로 그의 부와 영광이 극에 달하게 된다. 그렇다. 히스기야는 극히, 아주 극히 부한 상태였다. 히스기야가 정확히 어떤 교만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아무래도 이 유다의 부흥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가령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멸망 직전에 있던 유다가 이토록 열국에 큰 명성을 떨치게 되고 재물들은 한없이 늘어나며 그가 행하는 모든일들이 형통히 이루어짐을 보면서 히스기야는 어떠한 생각을 품게 되었을까? 병상에서 낫게 된 것도 이 모든일들이 이루어지게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도 자신의 신실함, 능력, 지혜로 이루어졌다고 교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행위를 크게 뉘우친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사자들의 말에 더욱 과하게 반응하게 되었을 것이다.
“왕이여, 이 땅에서 이루어진 큰 이적에 대해 우리가 들었나이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나이까”
“우리의 거룩하고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어 이 모든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아니하였겠나이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크신 일을 찬양하는 사자들의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자신의 교만했음에 대해 크게 뉘우쳤기에 더욱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임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 말에 그의 모든 소유를 보여주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그를 시험하신다. 히스기야는 시험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는 시험에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그가 즉위하고 곧바로 스스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대대적으로 실행했으며 언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하나님께서 이에 응답하시고 히스기야는 그것에 매우 기뻐하지만.. 글쎄 과연 히스기야는 정말 이대로 유다가 계속 형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그도 그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에 유다마저 멸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은 결코 유다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으며 그저 시기를 늦추는 것밖에 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를 듣고 그 말씀이 선하다고 한 것이다. 주께서 그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 단지 준비를 하라고 경고 해주신 것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자신의 때에는 이르지 않게 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다. 이에 어찌 히스기야가 주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어떠한 모습을 기대하시며 이러한 시험을 주신 것일까?
그는 이 악함이 판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왕의 역할을 다하였다.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세우시며 바라셨던 그러한 왕의 모습 말이다. 그는 죽음이 닥쳐오므로 두려워하였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고 다만 주께 간구하였을 뿐이다. 한때 교만에 빠지기도 했지만 곧바로 이를 뉘우쳐 그 모습을 바로잡았으며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 말씀하셔도 여호와의 뜻을 의심하거나 울부짖거나 절망치 않고 그저 그의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며 겸허히 또한 기쁘게 그를 받아들였다. 이 정도면 히스기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을 잘 통과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도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들을 높이 평가했기에 그러한 시험을 내리시고 이를 통해 히스기야의 본 모습을 더 알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기대하시면서 말이다.
열약한 시대였으나 히스기야는 여태까지의 왕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알고 있었고 이를 행했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과연 유다 역대지략에 전무후무하다고 할 만큼 높이 평가되어 기록되기 마땅한 자격이 있는 왕이라 할 수 있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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