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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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463회 22-01-17 23:26본문
천국은 마치(1)
씨 뿌리는 비유가 있다. 어떤 이는 길가요 또 어떤 이는 돌밭이며 어떤 이는 가시떨기가 기운을 가리웠으니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는 명확히 단정 지을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좋은 땅,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만이 백배, 혹 육십배, 혹 삽십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 하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분명 집 주인은 좋은 씨를 뿌렸다는 것이다. 좋은 씨는 곧 천국의 아들들이라 하신다. 천국의 아들들이라 함은 분명 일반 신도라기보다는 주께 어느정도 좋은 씨로서 인정을 받은 이들이라 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사도로서 활동하는 자들 정도의 수준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구분 짓기 힘들 정도의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란 단순히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을 말한다기보다는 믿음 있는 체하여 그들 속에 섞인 자들 곧 거짓선지자들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추수 때가 오면 좋은 씨는 결국 알찬 곡식이 되고 가라지는 버려질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곧 씨앗일 적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일까? 이전에 삯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거짓선지자는 처음부터 거짓선지자 일까? 또한 하나님의 종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하나님의 종이였을까? 이런 의문처럼 추수 때가 되어 결실을 보기 전까지는 가라지와 혼동하여 곡식을 뽑을까 염려할 정도로 구분 짓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시각은 우리와 다르기에 애초부터 그들의 결과물을 아시고 구별하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추숫꾼 된 천사들에게는 결실을 맺기 전까지의 하나님의 종들과 거짓선지자들을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거니와 예수님께서도 결실을 맺기 전까지는 굳이 그들을 구분하여 뿌리 뽑지 않으신다. 어차피 결실을 맺고 그 후에 걸러내면 그만이기 때문일까? 혹은 결실을 맺기 전에는 그들이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일까?
천국은 마치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 하셨다.
또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하셨다.
그러나 그 어떤 씨보다도 작았던 겨자씨가 자라 단단하고 내실 있는 나무가 되어 새들의 쉼터가 된 것에 반해 누룩은 속 빈 강정과 같이 겉모습만 부풀리고 그 내용물은 이전과 같다. 심지어 좋게 말해 발효지 달리 말하면 부패의 일종. 방치하면 썩어가는 길만이 남지 않는가. 이는 마치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모습이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누룩은 성경에서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곤 했다. 또한 누룩은 부풀어지는 자가 아닌 부풀게 만드는 주체가 된다. 천국에 대한 갈망이 사람들을 헛되이 부풀게 한다는 의미인 것일까? 두가지 비유는 나란히 배열되어 말씀하시나 그 내용은 정반대되는 내용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어찌하여 천국이 누룩과 같다 하시는가? 오히려 겨자씨와 누룩에 대한 이 비유는 천국이 아니라 마치 믿음에 관한 이야기 같지 않은가? 올바른 믿음이 겨자씨이고 그릇된 믿음이 누룩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앞서 얘기된 좋은 씨와 가라지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도 보인다. 작은 씨앗이었으나 큰 나무가 된 겨자씨의 모습은 알이 찬 곡식과도 같고 실속 없이 뻗어나가 꼿꼿하기만 한 가라지의 모습은 누룩과도 같아 보이기도 하며 거짓선지자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이란 말 그대로 천국이 겨자씨와 누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천국을 바라는 마음가짐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천국은 단순한 살기 편한 낙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고 그분을 닮기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경유지이자 상징일지 모른다.
그러나 또 어떤 이에게는 천국이 마치 단순히 자기의 욕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지인 파라다이스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따라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은 겨자씨가 되어 나무가 되기도,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변 것들마저도 헛되이 부풀게 하는 누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열망은 어쩌면 믿음처럼 보이기도 어쩌면 욕심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 장사에 대한 비유도 앞선 비유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천국을 바라는 마음은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 장사의 모습으로도 말씀 되어진다. 앞선 비유와는 다른점은 이들의 모습이 막 믿음의 가치를 알게 되어 시작하는 신도들의 모습이라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보화와 진주. 둘 다 가치 있고 귀한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모습에는 차이가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하셨다. 사람이 이를 발견하고 숨겨두고는 기뻐하며 제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들인다. 또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 하셨다. 이자는 극히 귀한 진주 하나를 만나자 제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산다.
이는 매우 상반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 다 제 모든 소유를 팔았으나 한 명은 밭을 소유했고 또 한 명은 귀한 진주를 소유했다. 진주 장사를 하는 자는 귀한 진주를 찾기위해 수소문도 해야할것이고 진주를 보는 눈도 길러야하는 노력도 기울였어야 할 것이다. 그는 결국 귀한 진주를 만나자 제 가진 모든것을 팔아 그 진주의 가치를 증명해낸것이다.
그에 반해 밭을 산 이는 보화를 온전히 소유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 값을 치르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길에 버려진 돈가방을 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자는 밭도 보화도 제가 다 소유했다고 착각할 것이나 자신이 그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다른 이로 인하여 그것이 강탈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지 않는다. 또한 그 본래 주인이 나타나더라도 잡아떼면 그만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만의 착각이다. 그는 우연히 숨겨진 보화를 찾아내었지만 그 보화를 당당히 드러내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조차 없다. 스스로 정당히 얻지 못한 것은 자신 또한 언제든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도 뺏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설령 누가 빼앗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자신이 도적질 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화를 취하는 대신 무엇을 잃었는지 당장은 알지 못하나 스스로의 마음을 갉아먹으며 나중에야 깨닫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밭을 산 이에게든 진주 장사를 한 이에 대해서든 이들을 판단하는 말을 꺼내지 않으신다. 왜? 스스로 정죄 받기 때문인가? 혹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여기시기 때문일까?
또한 천국은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 하신다. 그물의 역할이 무엇일까? 물고기를 모는 것이다.
그들은 그물로 인해 모여짐을 당하고는 끌어 내어져 좋은 것은 그릇에 못된 것은 내어버림을 당한다.
이 마지막 비유에서 천국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천국은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자와 같았고 겨자씨와 같았으며 누룩과도 같고 밭에 숨겨진 보화이며 진주 장사와도 같았다. 이는 결국 물고기를 모으기 위함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천국은 마치 미끼와도 같다고 말이다.
천국이라는 미끼를 보고 사람들은 모여든다. 그중에는 좋은 씨도 있고 가라지도 있다.
시작은 혼동할 수 있을 정도로 흡사한 모습일 수 있으나 그 결과물이 나오면 명확해진다.
만약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때조차도 이를 구분해낼 재간이 없다면 결과로써 입증해내면 될 문제이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이를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곡식과 가라지가 결실을 맺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도 밭을 산 이와 진주 장사꾼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으신 것도 다만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하게 하시고 과정이 어떠하든 결국에는 결과물로써 판단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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