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버린 무화과나무 ( 열매 맺지 못한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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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1건 조회 2,119회 20-07-04 00:27본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열매 맺지 못한 자.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으로 들어오시며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신다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얻고자 하셨으나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자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고 무화과나무가 곧 마르게 된다.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얻고자 하셨으나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자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고 무화과나무가 곧 마르게 된다.
또한 마가복음에서는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으며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하고 그 당위성을 서술하고 있다.
또 베드로가 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 여쭈기를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한다
또 베드로가 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 여쭈기를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직 무화과가 날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걸까? 뿌리가 마른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의 앞으로 잘하라는 경고나 채찍질 같은 것이 아니다. 가능성 그 자체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영원히 그 기회를 거두어가신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흔히하는 저주란 그저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저주는 이와 달리 실질적인 형벌에 가깝다고 보아야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마가의 표현은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마가가 서술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열리지도 않을 시기에 와서는 열매가 없으니 영원히 그 뿌리가 마르게 하는 저주까지 내리셨다는 것인데,
이는 다분히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 옳지 않으며 과도한 처사라고 생각되게 만드는 서술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나오는 이 서술은 상황은 거의 비슷하지만 이 전개의 차이로 인해 상당히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이는 마가의 사견이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주께서 일부러 그렇게 의도하시고 서술하게 하신 것일까?
보통 여기서 무화과나무가 가리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생각되는 듯하다.
처음에는 그것조차도 몰랐다. 그저 열매 맺지 못한, 주께서 원하시는 때에 준비되지 못한 자들을 뜻하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오시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택함받은 특별한 백성들은 아니게 되었을지언정 이 무화과나무처럼 영원히 뿌리가 말라 가능성을 박탈당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좆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이는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혹 아니라면 어떠한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걸까?
이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규명할 수 있는 집단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어떤 집단에서 간 건에 그 집단 안에서도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무리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자잘한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로 취급되는 어떠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무리의 성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 무리의 성향은 무엇일까?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보여지는 인간들의 모습인데
(사실상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간이라는 더 큰 카테고리로 규명 지어도 될 것이다. 성경에 서술되는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른 이들과의 차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그 기회는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져 이제는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균등히 나누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기회는 주어졌으나 선진들의 모습처럼 주의 이름으로 행하며 참된 성장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환난에 허덕일 때는 주를 찾다가 주께서 손을 내미시고 인도하시면 단것만을 취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버려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그에 따라 오는 결과를 당하고 또 주를 원망하는 것이다. 후에는 그 모습이 아주 끝이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기까지 한다. 보통 지배자층들은 주의 이름만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 하고 하층류 인민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제게 주어지는 좋은 것만을 따를 뿐이다. 그게 하나님이든 아니면 그저 그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이건 말이다. 물론 힘이 없는 자들이니 그렇게 굴복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대면 세상 그 누구가 자신의 삶을 책임진다는 말인가? 모두 자신의 선택으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규명할 수 있는 집단을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어떤 집단에서 간 건에 그 집단 안에서도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무리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자잘한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외로 취급되는 어떠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행동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무리의 성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 무리의 성향은 무엇일까?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보여지는 인간들의 모습인데
(사실상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간이라는 더 큰 카테고리로 규명 지어도 될 것이다. 성경에 서술되는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른 이들과의 차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고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 이후 그 기회는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져 이제는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균등히 나누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기회는 주어졌으나 선진들의 모습처럼 주의 이름으로 행하며 참된 성장을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환난에 허덕일 때는 주를 찾다가 주께서 손을 내미시고 인도하시면 단것만을 취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버려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그에 따라 오는 결과를 당하고 또 주를 원망하는 것이다. 후에는 그 모습이 아주 끝이 없이 바닥으로 내려가기까지 한다. 보통 지배자층들은 주의 이름만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 하고 하층류 인민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제게 주어지는 좋은 것만을 따를 뿐이다. 그게 하나님이든 아니면 그저 그들을 이용하려는 자들이건 말이다. 물론 힘이 없는 자들이니 그렇게 굴복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대면 세상 그 누구가 자신의 삶을 책임진다는 말인가? 모두 자신의 선택으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물론 예외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무화과나무가 어떠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영원히 말라지게 되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주께서 생각하시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이제 버림받기에 마땅한 자들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하신 것이 아닐까? 제자들은?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온 부자는?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이러한 의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자동적으로 예수님께서 부정적으로 바라보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른 무리로 분류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 대상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특정 지어도 처음에 가졌던 의문은 해결되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이 아무리 문제가 있는 집단이라 결론지었다 한들 주께서 그들의 가능성을 영원히 뿌리 뽑았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 특권 계층의 지배자들, 제사장들이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주께서는 받아주시지 않을까? 바울이 처음에는 알지 못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했듯이 말이다.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깨달을 수 있는 그 사고능력 자체를 빼앗아 버리심으로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일까? 바울이 주께서 깨닫게 하셨듯이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는 절대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간에 주께서는 그들이 회개한다면 분명 받아 주실거 같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이 아무리 문제가 있는 집단이라 결론지었다 한들 주께서 그들의 가능성을 영원히 뿌리 뽑았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 특권 계층의 지배자들, 제사장들이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주께서는 받아주시지 않을까? 바울이 처음에는 알지 못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했듯이 말이다.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깨달을 수 있는 그 사고능력 자체를 빼앗아 버리심으로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일까? 바울이 주께서 깨닫게 하셨듯이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는 절대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간에 주께서는 그들이 회개한다면 분명 받아 주실거 같다는 것이다.
그러다 혹시 생각해 본 것이 만약 이 무화과나무가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특권 즉 주께서 택하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이스라엘의 형성, 주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 말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특별함을 잃고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이 허락되게 되며 예수님께서도 여러 가지 말과 행동으로 그걸 은연중에 계속 드러내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며 말씀하시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은 그들의 지혜를 칭찬하시며 더욱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생각으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셨으며 이를 통해 어떤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뿌리로 돌아가 보면 당연하게도 아브라함이 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는 열국의 아비가 되며 그의 후손들은 심히 번성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에게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보여주는 이가 나타나길 기대하셨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기회를 주며 인내하시며 기다리셨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는 열국의 아비가 되며 그의 후손들은 심히 번성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에게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보여주는 이가 나타나길 기대하셨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동안 그들에게 기회를 주며 인내하시며 기다리셨다.
예수님께서는 애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사실 몇 번이고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무화과나무를 아예 마르게 하시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었다. 열매란 성장의 결과물이기에 열매를 맺을 가능성을 앗아갔다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허락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과연 그런 일을 당해도 될만한 대상이란 대체 누구여야만 이게 합당한 처사라고 볼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께서는 누구에게도 그러한 일을 하실 이유가 없다.
가능성이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다. 단지 나무를 마르게 한 것이다. 나무란 이스라엘 그 자체이다. 나무를 마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번영하리라는 그 언약이 파기됨을 보여주신 것이며 그 뜻을 비치셨다.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주 따위가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에서의 결과인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과원 지기에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가로되 주인이여 금 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주께서는 삼 년뿐 아니라 얼마나 오랜 시간 기회를 주셨을까? 얼마나 많은 거름을 부어주셨을까?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찍어버림 당함이 마땅하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가. 주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실까?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어 말라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루빨리 주께서 바라시는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가능성이 박탈당한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다. 단지 나무를 마르게 한 것이다. 나무란 이스라엘 그 자체이다. 나무를 마르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번영하리라는 그 언약이 파기됨을 보여주신 것이며 그 뜻을 비치셨다.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저주 따위가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에서의 결과인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과원 지기에게 말한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가로되 주인이여 금 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주께서는 삼 년뿐 아니라 얼마나 오랜 시간 기회를 주셨을까? 얼마나 많은 거름을 부어주셨을까? 열매 맺지 못한 나무는 찍어버림 당함이 마땅하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가. 주께서는 지금 이 시대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실까?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시간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어 말라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루빨리 주께서 바라시는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댓글목록
스톤페이스님의 댓글
스톤페이스 작성일마가의 의도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열매가 없어 그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이 아님을 마가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숨겨진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기는 어려웠겠죠. 때문에 마가는 이곳에 그의 단서를 남기는 것입니다. 아! 이것 좀 이상하다. 왜 예수님께서는 시기도 아닌데 열매를 구하시고 또한 이 일로 나무를 저주까지 하시는 것일까? 모 이런 생각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