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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 (2) 용서하지 못하는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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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448회 22-02-1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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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2)

 

  

 자들이 모여 예수님께 묻는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것 즉, 겸손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왜 ‘돌이켜’라는 말을 사용하신 걸까?

어린아이는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은 순수하기도 하고 당돌하며 호기심도 강하기에 탐구열도 높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약한 자임을 인지하기에 눈치도 보고 무지하기에 실수도 많지만 받아들임도 빠르다.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린아이처럼 어려지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또한 순진무구하거나 맹목적이 되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란 낮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그 교만함에서 돌이켜 그렇게 낮아져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만약 내 자신이 무지하고 실수가 많은 존재임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낮춘다면 그는 결코 교만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작은 자인지, 그것이 정말로 중요할까? 제자들의 질문은 그리 좋은 의도에서 나옴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천국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무언인지를 말씀하실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신 것 같다. 교만의 문제성을 말이다. 그렇다면 교만이 왜, 어떠한 문제들을 야기하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도 없다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묻는 말에 대답해주시고는 이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 하시며 또 반대로 주를 믿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우선 이 소자는 앞서 말한 단순한 어린아이의 특수성을 가진 정말로 아직 미숙한 아이와는 사뭇 의미가 다른 것 같다. 이 소자는 주를 믿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예수 이름으로 소자를 영접할 때, 이는 예수를 영접한 것이라고 인정받기까지 한다. 이 소자는 적어도 주께 믿음을 따라 예수 이름으로 행함을 인정받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어린아이라 함은 실제로 어린 자라기보다도 보는 이의 시각에서 낮게 여기는 자라는 의미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소자를 실족케 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들은 꽤나 끔찍하게 보여진다.

또한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면 불구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생에 들어가려던 것이 지옥불에 던져지기까지 하는 모양이다. 소자 곁에는 하나님과 항상 뵈옵는 천사들이 머물기에 소자를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양과 같은 소자가 일백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소자란 어떠한 존재이길래 이리도 중히 여기시고 그들을 보호하시려, 실족케 하였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종들마저도 그리 내치신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소자를 가리키는 것이 정확히 어떠한 자들을 일컬음인지 생각해보자.

말 그대로 예수를 믿는 자들 중 가장 어린 자들일까? 믿음을 시작하는 단계인 일반 성도들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보기 힘든 면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보면 소자는 실족하기도 쉽고, 업신여김 당하기도 쉬운 듯하다. 그러나 사실 소자를 대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며 그 죄를 돌이키게 할 때도 비난하는 것이 아닌 권고의 선을 지켜야 한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신다.

일반 성도들이라면 이게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들이 실패하는 것을 주께서 원하지 않긴 하시겠지만,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께 충분히 인식되었는가도 불분명하고 그들의 믿음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인지 또한 확실치 않다. 그저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종에게 맡김이 될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주께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이 어린양들을 맡기시는데 만약 그들을 그렇게 조심스럽게만 대해야 한다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이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종 또한 실수하는 일이 없기란 매우 힘들지언데 그 일로 인해 그들이 실족 당하였다 한들 지옥 불에 던져짐이 마땅하단 말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무언가 완벽하고 무결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훈련받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어린 양들을 맡기심도 어린 양을 기르기 위함보다도 그를 훌륭한 목자로 기르심이 진정한 목적 아니셨을까? 종들이 어린 양들을 가르치는 수단이라 여김보다도 그들이 성장하여 하나님께 가까워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지 않겠냐는 것이다.

 

 

 

 든 하나님의 종들이 완벽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기도 하며 때론 길을 잃기도, 실족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자처럼 가르침을 원하고 실수도 하지만 계속해서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에는 아직 한참이나 가르치고 성장해야 하는 하나님의 종들. 그들이 소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실족케 되는 일은 언제든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결국 소자를 업신여기고 실족케 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인 행위가 된다. 언제든 자신도 그 형제처럼 그러한 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같은 하나님의 종을 업신어기여 실족케 만듦으로 인해 그가 영영 하나님께 잃어진다면 어찌 큰 문제가 되지않겠는가. 감히 그 얼굴을 들기도 힘들 것이고 그렇기에 차라리 그 범죄케 하는 육신을 찍어내어 버림이 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만을 품는 것이 그리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서로가 실수할 때마다 외면하기만 한다면 누구도 올바른 목적지에 도착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가 길을 잃고 헤매일 때에 방치하여서도 안되고 실족케 하여서도 안된다. 이와 같이 양들을 단 하나라도 잃는 것은 주께서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통해 이를 경계하시고, 그들을 잃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명확히 하신 후,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닌 올바른 방법을 제시해주신다.

그것이 바로 형제를 권고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를 행할 때 결코 형제를 위하는 마음이 아닌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여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비판이라는 표현보다도 부드러운 권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게 아닐까?

 

 이렇게 겸손에 대해 강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나아와 몇 번이나 용서하여야 하느냐고 물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의 말의 기반에는 자기가 용서를 베푸는 입장, 우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라면 할 수가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한 종을 들어 극단적인 비유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종을 모습을 바라보며 경악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들의 모습일지 모른다.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은 그 종의 모습보다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께서는 베드로가 숫자에 연연해하는 것을 보시고는 부러 더욱 극단적으로 말씀하신다. 결국 이를 통해 말씀하시고 하는 바는 몇 번이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그 마음의 교만으로 인해 죄를 범하고 만다. 결국에 단순히 형제의 죄를 몇 번 용서하고 넘어가는 식으로 해도 그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치 못한다면 이러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치심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드로는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내내 하고자 하신 말씀과 반대되는 마음을 보인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베드로처럼 형제가 실수하는 일은 언제든 있을 수 있다. 그럴때는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권고하여 섬겨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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