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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단계 – 자아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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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926회 23-03-2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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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남의 단계

자아의 죽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거듭남이란 진리를 좇아 믿음을 이루는 그 과정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가장 처음으로 거쳐야 할 기본 관문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께로 나아가는 그 좁고 험난한 길에서 말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주를 믿는 자라 인정받기조차 힘들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거듭남이란 대체 어떻게 하여야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이러한 니고데모의 말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나 또한 거듭남에 대해 그 못지않게 무지하기 때문이다.
거듭남이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못 박혀 죽은 것이라 하신다. 그를 믿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임당하신 것을 믿는다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번째 생을 얻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게 되며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말인가? 그러나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도 내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애초에 믿는다는 것은 정확히 어떻게 판가름한단 말인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우리는 육신에 영향을 받는다. 육으로 태어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행하는 수많은 죄악과 어리석음들은 모두 이로부터 기인 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사람은 이미 노아의 시대, 첫번째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여 버려짐을 받아 멸망 당한바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어리석은 행위로 인해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실망하시고 결국 우리를 떠나시게 된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육으로 난 사람은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결코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육으로 난 것은 어떻게 하여도 육을 따를수밖에 없으니 다시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삶을 마치고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죄 사함을 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사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시기 위해 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죽음을 이룸으로써, 육신의 죄로부터 벗어나 예수라는 새로운 신분을 입고 비로소 영적인 존재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진정 믿는다면 사실상 나는 이미 죽은게 맞다.
또한 앞으로의 삶은 내가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주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맞다고 그 믿음을 증명해 내보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거듭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다.

어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리 쉽게 되어지지는 않는다.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박아도 어찌나 끈질긴지 다시 살아나고 활개 치고 다니고는 하는 것이다.
항상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서 효과적인 방법은 이유와 방안,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다.
왜 자아의 죽음을 이루어야만 하는가. 육에서 태어난 내 자아는 그 수많은 죄악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법이 정하는 것 만이 죄가 된다고 여기는가?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법이 없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주께서 만드신 사람은 그 양심으로 인해 스스로 정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죽음의 필요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 죄가 나를 짓눌러 뭉개버릴 듯 무겁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더욱 발버둥 치고 간절해지지 않겠는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찬찬히 하나하나 나를 살펴보다 보면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장의 원동력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내 안에 내재 된 수많은 문제들과 결함들을 떠올리고 생각하고 수용하고 인정하여 자괴감이 한계에 이르르다 보면 나라는 존재의 필멸성,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요는 간절히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즉필생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결심을 굳혔다면 나를 죽이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행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죽었으니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께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주께서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지 알 수 없다거나, 어느새 예수 이름을 망각하고 내가 살아나 나를 주도하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후자의 경우는 앞선 작업을 반복하여 단단히 새겨놓는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깊은 이해까지 가기보다는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의 자아의 죽음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붙는 사족 같은 의문들은 그저 욕심에 대한 미련과 변명뿐이라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반복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끔찍이도 이를 이루지 못하고 완전한 자아의 죽음을 이루지 못한 채 맴돌기만 할 수도 있다.
이를 헤쳐나가지 못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원함에 있다.
머리로는 아무리 영적인 것들을 원한다고 생각해도 내 마음은 육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다.
내 안에서 영적인 것들의 가치가 육신의 원함보다 낮으니 더욱 간절히 행함에 이르지 못하고 망각하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영적인 것들이 그저 저급한 단계의 그 욕구들과 비견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생각에 불과하다. 단순히 납득하고 공감하고 받아들인 것만이 아닌 진정 내 안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에 이르는 그 명백한 이해의 소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한 자는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생각의 끝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자아의 죽음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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