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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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401회 24-07-20 19:39본문
성령으로 난 자
어느 날 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라는 자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는 이 야심한 밤에 대뜸 와서는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을 믿는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우리란 누구일까? 바리새인 전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는 관계인데 말이다.
그런 뜬금없는 방문에도 예수님은 한 말씀을 해주신다. 바로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다. 아니 오히려 이것만이 중요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또한 성경을 통해 이루려 하신 그 모든 일들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한낱 바리새인이 무어라고 심지어 아직 제자들에게도 하지 않으신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그에게 처음으로, 또한 이리 상세히도 말씀해주신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그리 말씀하신다.
하지만 니고데모에게 이 말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에 솔직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며 다시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당연히 이 말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면서 성령으로 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들은 소리는 들려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도 알 수가 없단 말이 아닌가? 그들의 기원조차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처럼 될 수 있겠냐는 말이다. 니고데모 또한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말이다.
이에 대답하시는 예수님은 다소 까칠해 보이시기도 하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한들 하물며 임금이라 한들 이를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들은 거듭남은 커녕 성령의 떠나심과 그 존재조차도 알지 못할 터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을 하신다.
증거를 주었으나 받지 않은 것은 너희라는 것이다. 거듭남에 있어서 이 믿음은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증거로서 세워진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말미암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비로소 영적인 여정을 걸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이 모든 수모를 겪으시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들은 이 증거를 받지도 아니하고 그 빛을 미워하며 배척한다.
그 행위가 그들에게 곧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런 행위를 돌이켜 빛으로 나아간다면 그들 또한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니고데모는 특이한 인물이다. 상당히 높은 직분의 바리새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마치 자신과, 또 그와 생각을 함께하는 듯한 ‘우리’라는 무리의 무고를 주장하듯 예수님을 믿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왜 하필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일까. 아마도 은밀히 행동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에게도 두 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부패함과 예수님을 인정하는 마음과 그럼에도 바리새인으로서 높은 관직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말이다. 어쩌면 그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니고데모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은 그런 애매한 상태에 놓인 니고데모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하신다.
바리새인의 대표격으로서의 그를 대할 때는 바리새인들의 행태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신다. 이는 비단 니고데모를 향한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라는 투과체를 통한 것 일뿐 실제로는 바리새인들이 그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 또한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을 알아야 함이 옳은 것이다. 예수님이 아직 일을 끝마치시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가르치는 자라면 성령의 존재와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알아야 함이 마땅치 않겠는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많은 기회를 주신다.
첫째는 거듭남에 대한 말씀 자체를 해주시는 것이 가장 크고, 둘째로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일깨워 주셨으며 셋째로는 어떻게 해야 이를 돌이켜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주신다.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음은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신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켜 회개한다면 기쁘게 받으시지 아니할까.
니고데모는 과연 예수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잡았을까? 그 후로 진정 그 말씀을 따라 돌이켰을지는 모를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심은 그가 간절했기 때문일까? 혹은 뛰어났기 때문일까?
니고데모는 바리새인과 믿음을 시작하려는 단계에 있는 자 그 둘의 입장을 모두 지닌 자였다.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믿음을 시작하는. 그렇다. 거듭남이라는 말이 필요했던 자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는 비단 니고데모와 그와 함께하는 무리만을 위하여 해주신 말씀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뒤로도 이 말씀을 보고 듣게 될 수많은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때 이러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지 않았을까. 이 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라면 깨닫고 돌이켜 시도하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니고데모와 같은 자리에서 선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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