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과 표적 그리고 꿈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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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46회 25-07-17 22:18본문
이적과 표적 그리고 꿈과 이상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수많은 이적들을 베푸셨다.
그러나 그 이적들은 과연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사람들은 환호하였으며 또한 더욱 이적을 갈망했지만 그것이 정말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잠깐의 음식이, 고침 받음이 물론 달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그걸 무엇보다 잘 아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이적을 베푸셨던 것일까. 때문에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 고침이 단지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려 하심이 아니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단지 그들의 굶주림을 없이 하려 하심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이적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힘으로는 하지 못할, 사람들이 섭리라 부르는 무엇인가를 거스르는 현상을 말할 것이다. 예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지자들을 통해 이적을 베푸시곤 하셨다. 대표적으로는 역시 모세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정말이지 다양하고 놀라운 이적들을 베푸셨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면서까지 그 재앙들을 보이신 이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또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하셨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사실 대부분의 이적은 무언가 증거되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이적과 표적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의미가 된다.
단순히 신비롭고 놀라운 체험이 아니라, 그저 강대하고 권세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애석하게도 이를 항상 은밀히 숨기시는 방식으로 말씀해주신다. 단지 현상에 눈이 팔려 놓치기 쉬운 방식으로 보여주시곤 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이적과 표적 외에도 있다. 바로 꿈과 이상이다.
꿈과 이상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꿈은 우리의 육체가 잠들고 의식만이 다른 세계에 접속하여 진행되는 현상으로 느껴진다.
또한 내가 아닌 상태로도 진행되기도 하며 때때로 자신의 의식에 영향을 받아 구축해나가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은 의미 없는 꿈이지만 간혹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기도 한다. 소통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반면 이상은 육체와 의식 모두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진행이 된다. 의식 자체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에스겔의 이상과 다니엘의 표현에 따르자면 아무래도 뇌 속으로 영상이 바로 전달되는 현상으로 추측된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으실 때 사용하시는 방식이다.이 이적과 표적 그리고 꿈과 이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소통의 방식들 중 하나라는 것과 때문에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숨겨진 뜻을 알아내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다 보면 사실 이 뿐만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들은 모두 이렇듯 다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반드시 해석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이적들에게 저마다 더 숨겨진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내야 할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이적을 보길 원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이상을 경험하길 구하고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는 그들이 아무리 많은 표적을 보여준대도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음란을 저지를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들에게 의미 없이 이적을 베푸는 것이 아닌, 그 방식을 바꾸어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열린 더 진화된 소통의 방식 속에서 이적을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또 이로 인해 믿게 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스스로 표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전처럼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아무리 계속 의미 없이 표적을 구한다 한들 이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성령을 통한 소통 그 자체가 이적이고 또한 증거가 될진대 이에 무엇을 더 바라고 무엇을 더 증거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이전의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구하는 자들은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 그들은 애초에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이적으로 인해 떨어질 콩고물만을 바라는 악하고 음란한 자들일 뿐인 것이다. 더 나아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자들은 그 권세를 흉내 내 훔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려 이리처럼 하나님의 백성들 마저도 늑탈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적을 구하고자 한다면 진정 무엇을 위함인지 그 의미에 대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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