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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 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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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82회 26-09-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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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 누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여정 중이던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하다. 아무리 아내가 아름답다 한들, 그로 인해 죽을까 두려워하며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연막을 치자는 것이다. 이는 조금 과한 반응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이야기이다. 어떠한 인물이 특정 키워드에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실 과거의 비슷한 상처가 있기 때문이라는, 어찌 보면 클리셰 아닌가. 
아브라함은 이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과연 아브라함이 언제 이런 일을 겪었단 말인가? 
그러나 본인이 아닌, 그의 주변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쉽게 추측해볼만한 대상이 나온다. 그의 형제 하란이다.
 
하란은 특이한 인물이다. 다음 대로 이어지는 직계 자손도 아닌데 계보에서 굳이 그의 죽음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형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는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기록되어 있다.
왜 굳이 아비보다 먼저 죽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고 심지어 그 윗대인 데라의 아비 나홀도 그 아비 스룩보다 먼저 죽었는데 말이다.
하란은 롯과 밀가 그리고 이스가를 낳았으며 그 중 밀가는 하란의 형제, 나홀과 결혼한다.
그리고 롯은 이후 아브라함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란의 아내는 어디가고 아브라함이 롯을 맡았을까?
자녀들이 있는데 그 아내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그 불미스러운 일은 아무래도 하란에게 일어난 것 같다.
그의 아내는 아리따웠으며, 그로 인해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여전히 그의 아내는 그 무도한 자들에게 사로잡혀 생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일을 할 만한 이들이라면 아마 굉장한 권력자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일은 그의 가족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그런 가정하에 다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그 과하다 싶은 대처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려 대를 이어서까지 비슷한 일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이 이 여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이 여정의 시작은 사실 데라가 주도한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비 데라는, 갑자기 아브람과 아내 사라, 롯까지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가던 와중에 하란에 이르르더니 그곳에 정착한 것이다.
애초에 왜 데라는 가나안땅으로 향한 것일까. 또한 왜 이를 저버리고 하란에 머무른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 여정의 진정한 목적은 후에 서술되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명하신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신다.
사실 이 여정의 시작은 데라가 아닌 아브라함일 가능성이 있다. 서술만 보면 마치 하란에서 머물다 이 말씀을 듣고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말은 하란을 지칭한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 거하던 갈대아 우르라 봄이 더 정확할 수 있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 있을 적에 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여호와의 말씀을 좆아 가나안으로 향한다. 원래의 목적지였던 가나안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롯을 데리고 떠나려 한 것은 아브라함이고, 데라는 그저 동행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갑자기 데라가 뜬금없이 가나안땅으로 향한 이유도, 자녀들 중 아브라함만 데리고 간 이유도 설명이 되지 않는가. 그가 연장자기에 주도하여 움직였을뿐 사실 이는 아브라함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의 여정에 동행할 정도라면 데라는 아브라함이 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공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함께하지 않고 하란에 머무른다. 심지어 후세에 여호수아의 말로는 데라는 강 저편에서 이방 신을 섬겼다 한다. 갈대아 우르는 이방 신을 섬기던 지역이었다. 하란 또한 매우 번성한 중심 도시였으며, 후에 하란 인근 밧단아람에 머무르는 나홀과 그 자손들을 보면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우상숭배를 하였던 듯하다. 심지어 아직 노아가 떠나기도 전인데, 어찌 이리들 다른 신을 섬겼던 것일까. 데라에게는 애초에 여호와를 찾고자 함이 없었던 것인가?
그는 아들을 불미스러운 일로 잃었고 심지어 그의 아비 나홀은 이상하게도 평균연령의 절반밖에 살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아비 나홀의 이름을 물려준다. 이것이 모두 그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걸까? 데라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상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 상처를 하나님을 통해 치유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가나안으로 가지않고 하란에 머문다. 따라나선 이유도 사실 하란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때문이었을 수 있다. 아니면 처음에는 그저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에 깊이 공감하여 동행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과 같은 도시라니, 이건 또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면 애초에 하란에 좋은 추억이 있어 아들의 이름을 그리 지은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그는 아브라함의 여정을 지체시키고, 또한 끝까지 하란에 머물다 생을 마친다.
그렇게 그는 편안하고 풍요로운 성읍, 하란에서의 삶에 만족하여, 안주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에 반면 아브라함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자 여호와께서는 이제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신다.
그렇게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동안 주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다 어느 날 기근이 닥친다.
기근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처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의 우려가 과함이 아니었다는듯이, 애굽에 이르자마자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는 백성들이며 대신들이며 난리가 난다. 그렇게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입궐하게 된 것이다.
하란의 일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그러했던 것일까?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권력자가 뺏어서라도 취하는 일이, 어쩌면 횡행하는 시대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뭔가 좀 익숙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내려진다. 그제야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아내와 그 소유를 데리고 떠나게 한다.
왜 아브라함은 예물인듯한 그 재물을 받았을까? 왜 마지막까지 자신의 아내라 밝히지 않았을까? 정말 죽음이 두려워서일까.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잘못 건드려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 그렇게 이 사건을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몇 십년이 흐르고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한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잘 살다가 갑자기 남방으로 이사한다며 그랄에 우거한다.
사라의 경수가 이어지며 외모가 다시 젊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나이가 일흔인데도 이번에도 사라를 누이라 하니 그랄 왕 아비멜렉이 바로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취하려 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직접 현몽하시어 친히 경고를 내려주신다. 또한 그의 의도가 온전함을 인정하시어 범죄치 않게 하려 하셨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그리 한 연유를 묻자 대답하는 내용도 어딘가 이상하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한다. 또한 사실 이복누이인 것도 맞다는 그런 궤변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태도는 두려워함보다도 오히려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과도 같은 모습이다.
심지어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아직 죄를 범치 않았음에도 가축이며 노비며 은 천 개까지 들려 보내어 자신의 수치를 풀게 한다. 그제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까지 치료하사 다시 생산케 하신다.
아니, 아직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들은 사라의 연고로 태가 닫힌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자손을 생산치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 큰 형벌이 되기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은 대를 이어 이삭에게 일어난다.
아브라함때의 첫 번째 큰 기근에 이어 두 번째 기근이 발생하자 이삭은 애굽으로 떠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이 아닌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 하신다. 그리고 그곳은 또 그랄이었다.
세 번째까지 오자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들의 태도가 순화되고 있음을 말이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다른 지역이라는 차이라도 있지만 이번에는 부러 같은 지역에서 일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심지어 리브가를 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혹시 미모가 부족했나?
하여간에 꽤나 오랜 기간 정착해서 살다가 창을 통해 둘이 남매가 아니라는 것을 들켜버린다. 심지어 왕에게 직접 말이다.
왕은 이삭을 불러 그러한 연유를 묻는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지령이라도 받은 것일까. 죽을까 두려워 그리하였다 답한다.
왕은 이로 인해 우리가 죄짓기 쉬울 뻔 하였다 하며 이삭을 책망한다. 이제 이 나라에서는 이러한 일이 명실상부하게 수치스러운 죄목이 된 것 같다. 거기에 더해 이삭이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백성에게 선포까지 한다.
아니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말인가? 갑자기 왕이 너무 바람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이제는 선량한 그들을 의심한 이삭의 행동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다.
이런 이들의 변화가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냥 어쩌다 한번 나오는 선량한 왕이 걸린 것이란 말인가?
 
첫 번째도 세 번째도 사건의 시작은 기근에 의한 불가피한 이동이었다.
심지어 세 번째에는 정확히 그랄로 인도하신 모양이고 말이다. 이는 분명 하나님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뜻이다.
세 번의 사건은 모두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으로 이끄시고, 아브라함 혹은 이삭이 덫을 놓고, 왕이 덫에 걸릴 뻔하고, 하나님께서 재앙이든 경고든 내리시고, 왕들은 돌이켜 선히 대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마치 짜여진 각본같이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대체 무얼 말씀하고자 하신 것일까.
 
 
사실 본래 그들이 행했던 패괴한 일들은 꽤나 전통있는 일이었다.
무려 첫 번째 세상 때부터 존재했던 일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여자를 권력자들이 취하는 것, 자신의 욕심을 위해 영적인 것들을 저버리고 육체의 요구를 따르는 것, 이를 통해 우수한 자손을 생산해내는 것까지. 마치 정해진 절차처럼 반복되는 일이다.
이는 첫 번째 세상이 멸망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닫으셨는지도 모른다. 뛰어나고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 위함이라는 그들의 변명과도 같은 표면상의 이유를 저격하는, 어떻게 보면 네피림 사건을 예표하는 어떤 상징적인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사단의 계략하에 일어난 이런 이들은 어쩌면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그 왕, 다윗마저도 이에 빠져 실수하여 말년을 망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치 이 일련의 사건들은 ‘권력자들의 패악한 관행 ~희망편~’ 이라도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일이 과연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어떠한가. 사실 아브라함의 그 의뭉스러운 태도는 모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상처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알고 계셨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가 있었을 때조차도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긴 커녕.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멸망 당하게 되는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의인 한명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말이다.
아브라함의 행위를 덫이라고 표현했다만. 사실 정말 함정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그들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더러움도 드러내야 도려낼 수 있는 법. 그들이 원래 행하던 방식대로, 고분고분한 태도로 그 악습을 끌어내어 표면화시킴으로 그 문제를 질책하고, 또한 그들에게 돌이킬 기회 또한 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을까? 혹은 반신반의 했을까.
두 번째 사건이 있기 전, 아브라함은 소돔으로 향하는 여호와를 마주친다. 그리고 주께 구하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그가 배운 대로 구한 것일 수도 있다. 악인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열 명의 의인이 미치는 영향에 의해 그들이 돌이켜 구원받을 가능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나님께로부터 그렇게 가르침 받은 대로 말이다.
 
왕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거짓말을 책망하지만, 이는 사실 그들을 향한 테스트였을 뿐, 속이려 함이 아니다.
올바른 관념을 심어주고 성장하게 만드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사건에 와서는 마지막 확인 작업에 가깝다. 그들은 놀랍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아브라함의 영향으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를 두려워함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한 명의 의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홀로 의로운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는 듯하다.
개인의 성장이, 선한 의가, 곧 모든 이들의 변화의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이 어둡고 더럽다 한들 이에 연연하여 지체하지 말자. 오직 나의 성장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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